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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8.멸망하는 것의 아름다움/박범신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5. 13:07

/멸망하는 것의 아름다움

좁은 마당이지만, 가을 깊으니 텅 비었다.

꽃 욕심이 많아 해마다 봄이면 빈자리 없이 일년초를 사다가 심곤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을 늦도록 피는 백일홍과 취꽃, 베고니아가 흐벅지게 피어 있었는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밤을 보내고 나서 뜰에 나가보았더니 모두 식초에 담가낸 것처럼 흐물흐물, 무너져 있다.

보기가 싫어 모조리 뽑아 허드레 자루에 눌러 담는다.

마음 속에서 쏴아 하고 바람 소리가 난다.


어떤 꽃은 계속 피고 어떤 꽃은 계속 졌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피고 지는 꽃이 시간 속을 흐르는 것 같았다.

아침에 먼저 뜰로 나가 새로 벙글어진 꽃들을 찾아보는 게 제일 행복한 일과였다.

젊을 때 살던 시골집 마당에도 더러 꽃나무가 있었지만, 꽃이 이렇게 예쁜 줄을 몰랐다.

다른, 젊은 욕망들이 내 주인인 것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꽃뿐인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예쁜 게 너무도 많다.

평생 곁에 두고 사용하면서 한번도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재떨이조차도 어느 날 다시 보니 예쁘고, 찻잔 하나 밥그릇 하나도 예쁘고, 책상, 의자, 장롱의 무늬도 예쁘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주인이 다시 집어들 날을 기다리고 있는 묵은 책들도 예쁘다.

살아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꽃만 예쁘고 풀은 예쁘지 않겠는가.

풀은 예쁘고 나무는 예쁘지 않겠는가.

온갖 짐승도 다 그렇다.

예전엔 미운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미운 것은 잘 안뵈고 예쁜 것만 먼저 뵌다.

얼마 전까지 미웠던 사람조차 다시 보니 예쁜 게, 참 이상하고 오묘하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눈물겹다.


물론 예쁜 것의 으뜸은 사람이다.

사람처럼 추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독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불쌍한 것이 없고, 그리고 사람처럼 예쁜 것이 없다.

사람 속에 무엇보다 사랑의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 그럴 터이고, 사람만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이다.

모든 게 영원하다면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또 눈물겹겠는가.


가을의 뜰은 존재의 멸망을 보여준다.

나는 이윽고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제일 눈물겹고 예쁜 것은, 어쩌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나무들이 울울창창 뻗어나던 봄과 여름의 뜰이 아니라, 지금의 텅 빈, 멸망의 뜰일는지 모른다.

자본주의적 세계 경쟁이 불러오는 헛된 안락과 상대적인 소외의 비명 소리가 울울창창한 오늘날의 세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멸망의 아름다움을 잊기 쉽다.

그러나, 텅 빈 뜰을 보라. 나뭇잎이 다 떨어진 황량한 산야를 보라.

가파른 경쟁의 밀림을 숨 가쁘게 내달리다가 지금 어깨를 웅크리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당신의 그림자를 보라.

가장 눈물겹고 예쁜 것의 본체가 거기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 홀로 있을 때 확인해야 하는 것은 멸망의 아름다움이다.

그 쓸쓸한 망명정부 같은, 또는 허공을 닮은.

가을의 뜰이 내게 그걸 가르쳐준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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