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5.산다는 것은....주여, 어느덧 가을입니다/박범신
/주여, 어드덧 가을입니다.
우리는 만취해서 기다시피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웠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방귀를 여러 번 뀌었고 여태껏 애들 뒷바라지로 지친 아내는 전에 없이 드르렁드르렁, 우렁차게 코를 골았다. 생의 길고 혹독한 ‘리얼리즘 단계’가 마침내 끝났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부부는 보통 3단계의 인생을 함께 겪는다.
죽어라 물고 뜯다가도 포도주 한 잔이면 사랑의 달콤한 꿀주머니 속으로 황홀하게 투신하는 짦은 신혼 시절을 나느 보통 ‘낭만주의 단계’라고 부른다.
내 경우 이 단계는 채 반년도 되지 않았다. 새끼는 고사하고 나와 아내만을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들었던 절대 빈곤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리얼리즘 단계’
세상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 내 꿈도 지켜나가야 하는 길고 혹독했던 리얼리즘 과정을 살 때, 나는 매일 썼고 매일 가정을 버리가를 꿈꾸었다. 리얼리즘 단계에서는 부부는 시댁과 처가댁의 문제, 자녀 교육문제, 직장문제 등 수많은 문제에 대한 각자의 역할과 관계 때문에 많이 싸우기도 하고 위기도 겪는다. 나 또한 그 과정을 혹독하게 겪었다. 서로의 자리를 찾아 앉는 것만 해도 출혈하듯 상처와 고통을 바쳐야 했다. 때때로, 정말 이불 속에서 빠져나가듯이 표 안 나게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언제든 내 ‘집’에서 뻐져나가고 싶었다.
나는 취해 잠든 아내를 오래 내려다 보았다.
기미가 끼고 사뭇 똥배도 자리잡은 아내는 취해 잠들었기 때문인지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때 아, 나는 보았다. 아이들이 떠난 텅 빈 집 안, 혹은 잠든 아내와 쓸쓸한 그림자에 덮인 내 자의식 사이로 가을이, 아니 시간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채우는 것을. 불같았던 한 시대가 가을빛 속으로 속절없이 침몰하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튿날 늦은 아침 녘, 막 깨어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휴머니즘 시대가 도래한 거야’
나는 하릴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맑은 가을 햇빛아래, 뜰 한 켠에서 제멋대로 자란 키 큰 취꽃이 하얗게 꽃을 피운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국화꽃이 무더기로 핀 것도 내다 보였다. 간밤에 남몰래 피워낸 꽃들이었다. 그 순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낭만주의 단계도, 리얼리즘 단계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아름답고 고요한 그 가을꽃들 덕에 선뜻 깨달았다. 인생의 진정한 승부는 마지막에 만나는 ‘휴머니즘 단계’에서 어떻게 살아내느냐, 또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느냐로 결정된다는 것을. 그래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인생이 지금 막 내게 밀려오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내 입에서 릴케의 시구가 절로 흘러나왔다.
‘주여, 어느덧 가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