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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워서 좋은 날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5. 13:02
2005.2.1.화. 2월 초하룻날.

이렇게 추울 수가?
모두들 난리다.
춥다, 춥다.
매스컴이 더 춥다.
영하 14도, 체감온도 영하 25도,
올 들어 다시 최고로 추운 날씨.
호들갑, 호듭갑을 떤다.
호들갑을 떨어댈 만큼 춥기는 춥다.

오늘 나는 2시간여를 밖에서 추위와 함께 낑낑대며 뒤엉켜 놀았다.
추위란 바로 이런 것이며 이런 추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인지,
겨울은 추워야 겨울다운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

추위는 우리 삶의 번뇌와 같은 것 아닐까?
추위 없는 겨울이 겨울이 아니듯이, 번뇌 없는 우리 삶이란 무미건조한 것 아닌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것은 겨울의 추위 같은 것,
우리 삶의 일상 중의 단순한 하나이니 즐거워하고 반가이 맞이할 것이라, 라고 깨우쳐 주고 있었다.

손이 시럽고, 발이 시럽고 또 등이 시러웠다. 운동을 하는 동안 2시간여, 온몸이 시러웠다. 특히 발이 더 시러웠다. 그러나 마음은 춥지 않았고 오히려 든든하다 하였다.
이렇게 추운 날, 무슨 정성이 들었다고 이 짓을 하는가, 난 정말 어긋나기 선수인가?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고3 겨울 어느 날 새벽,
그 때 새벽의 서울역은 추웠다.
어느 대학의 특별전형을 위해 급히 상경한 촌놈을 서울은 춥게도 맞이해 주었다.
엉거주춤하고 얼떨떨하게 맞이한 서울은 남녘의 그것과는 천연 달랐다.
그러나 그 때도 마음은 추운 줄 몰랐다.

신병훈련을 마친, 73년 겨울 어느 날,
그때 양평도 추웠다.
양평의 추위는 익히 알아주지 않던가.
신병 훈련을 막 마친, 허허로운 마음밭에 양평의 바람은 거세게 춥게 불어댔다.
공수훈련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소리는 더 춥게 들렸다.
그래도 마음은 추운 줄도 모르면서, 무서운 줄도 모르면서 3 년을 튼튼하게 넘겼다.
군대 오기 전 엉성엉성하고 숭얼숭얼하게 들었던 나의 속된 바람기까지 어느 새 다스려져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76년 겨울 어느 날,
수원의 자췻방은 냉골 그리고 냉골, 얼음장같이 춥기만 하였다.
수원의 추위는 서울의 그것보다 훨씬 매서웠다.
방학인데도 시골에 가지 않고 추위를 벗삼아 냉엄한 현실과 씨름하고 매정한 사회와 다투고 있었다.
농촌은 이미 늙어버린 우리들의 어머니,
도시의 아들들에게 모든 것들을 주어버렸으니 지금은, 앞으로는 무슨 힘으로 살아갈 것인가?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면 잘못이었는데,
서울까지 가지 않고 수원에서 내린 것은 어떤 사연이고 무슨 인연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새롭게 무엇을 할 것인가?
몸은 추웠지만 그래도 마음은 무슨 셈인지 셈을 하느라 추운 줄도 몰랐다.



오늘은 2월 초하룻날,
추위를 애써 찾아 나서다니 이를 어찌 셈해주어야 할 것인가?
그 동안 따뜻한 사무실에서, 따뜻한 자동차 안에서 과거의 추위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었구나 싶었다.
오늘 밖에서 단 2시간 여,
추위와 함께 있어보니 그동안의 호사가 아주 지나쳤음을 알게 되었다.
겨울을 겨울답지 않게 보낸 세월이 새삼 허망해졌다.
겨울은 추워야 겨울인 것이고, 그 속에 사는 사람은 그 추위를 맞이하고 함께 살아야 진정 사는 것이 아니던가?

나의 어린 시절,
설이 가까워오면 이렇게 추위가 매섭게 휘몰아치곤 하였다.
수확이 끝나 텅 비어 훵한 논밭을 가로질러 읍내에 심부름가는 길,
바람이 쌩쌩 불어댔지만 조금도 춥지 않았다.
쌀을 엿방에 갖다주고 조청을 만들어오는 심부름은 결코 싫지 않았다.
벌써 유과에 발라진 달콤함이 내 마음 속으로 이미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오늘 서울 거리의 바람은 매서웠다.
볼에 부딪치는 바람이 살을 깎아내려 하였다.
코를 막 베어내고 있는 듯 하였다.
서울의 겨울이 어떤 것인지 오늘 비로소 알게 해주었다.
그 동안 잊혀졌던 겨울이, 지워졌던 추위가 다시 살아서 돌아왔으니 얼마나 반갑고 좋은 일인가?
저 깊이 숨어 보이지 않던 나의 옛 시절들까지 불러내 보여주니 이 추위가 어찌 고맙지 않은가?

새해 들어 무엇인가 하나쯤 이루어보자 마지못해 애써 시작하였던 일이 만만치 않았는데,
오늘따라 생각지 않은 다른 하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부수입인가, 망외의 소득인가.
부수입이나 망외의 소득은 본래의 기대한 수입이나 소득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니,
오늘 나는 무척 춥지 않다.
오늘 나는 잊혀진 옛 친구 하나를 다시 만난 듯 좋기만 하다.
오늘 나는 살 맛 난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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