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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차 없이 살아보니(7)---`다음은 방배역입니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5. 11:04

전철로 출퇴근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일들을 만나게 된다.
정말 어처구니없거나 전혀 엉뚱한 일들이 생기곤 하는데 쓴웃음을 짓다가도,
이것이 오히려 재미있다.

‘다음 정차할 역은 방배, 방배역입니다.’
‘어, 아니, 왜 내가 방배 쪽으로 가고 있지? 교대역 쪽으로 가고 있어야 하는데.....‘
아침 출근 시간에 개찰구를 지나 습관적으로 무심코 전철을 탔더니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일반 직장인들과는 달리 아침 출근시간에 꼭 얽매이지 않는다.
전혀 서두르지 않고 느긋느긋하게 움직이지만 가끔은 아침 이른 시간대에 손님과의 약속이 잡혀있으면 조금 서둘러 출근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걸어서 전철을 타기보다는 마을버스를 이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평소의 방향감각과 어긋나게 되어 엉뚱한 일을 만들어내는 시작이 된다.
마을버스를 내려 들어가는 개찰구의 방향이 평소 걸어서 들어가는 방향과 다른 것을 미쳐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진행하다 보면 결국 엉뚱하게 반대방향의 전철을 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때로는 정말 어리숙하기도 하고 얼마나 단순하기도 한지 이제야 새삼 알게 된다.
나라는 인간도 별 수 없이, 아무리 지가 뭣이다 뭣입네 해도, 새로운 환경에 따른 방향감각하나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하던 대로 해버리니 얼마나 순진하고 단순한 것인가.

그 후 어느 다른 날,
갑자기 차창 밖이 훤해지고 있었다.
전철이 지하철을 지나서 지상철이 된 것이었다.
내가 내려야 할 잠실을 지나서 성내역까지 와버린 것.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잠시 졸았단 말인가.
잠실역에서 내려 분당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나는 이제 이런 일들을 만나도 예전처럼 조금도 멋쩍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늠름하게, 언제 뭐 무슨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더 느긋하게 원위치한다.

어쩌다 지각하는 ‘범생’은 몸둘바를 모르지만, 지각을 밥먹듯 하는 ‘못범생’에게는 늦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나도 이제 이러한 일들이 당연한 일상사의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늦게나마 그 어줍잖은 ‘범생’의 허울을 벗어 던진 거 같아 편안하고 더 신난다.
빈틈없이 빡빡한 기계적 인간에서 조금 어벙하고 허술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아 이런 내가 밉지 않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넘어가 버리는 내가 좋기만 하다.

차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전철로 출퇴근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너무나 인간적 허술한 일들,
이들이 있어 난 즐겁기만 하다.
이들을 너무 자주 많이 만나게 되면 그 땐 정말 습관되는 것이니,
이런 일들은 가끔, 정말 가끔만 일어났으면 싶은데, 욕심대로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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