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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브라질?----더불어숲에서 20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5. 01:41
---각성은 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입니다.(리오-상파울루의 고속도로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루벌이가 1 달러에도 못미치는 생존한계선.
850만 평방키로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국토를 가진 나라에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300년간의 식민지 시대와, 독립후 200년간의 역사.
20세기에 들어와 줄곧 매진해 왔던 경제개발은 어디로 갔는가.
동유럽의 붕괴가 사회주의의 실패라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자본주의의 실패.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광복이라기보다는 分家.
우리의 역사의식으로 비추어볼 때, 타민족의 침략과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이 아니라, 계열사로서의 분리의 의미.
브라질의 경우, 황태자인 돈 페드로가 포르투칼 본국의 귀국명령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성격이 독립 이후 2세기에 걸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원주민과 흑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박해 그리고 고문과 처형과 쿠데타로 점철된 라틴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반세기 동안의 경제개발 정책의 종착점이 된 ‘종속화의 길’,
라틴아메리카의 태생적인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외세와 외국 자본의 하부에 예속된 정치권력과 그 하부에 다시 수많은 사람들은 내국식민지화하고 있는 ‘중층적 변방화’의 현실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비단 라틴아메리카만의 현실이 아닌지도 모르며, 우리 세기의 기본적인 세계질서인지도 모른다.
브라질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집단적 무의식. 삼바 카니발과 축구에 대한 열광, 무한한 낙천성.
인구의 70%가 문맹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임금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이유로 정책적으로 기피되고 줄곧 식민지 시대 이래의 우민화 정책이 답습되고 있는 것.
교육을 중립적인 지식의 주입이 아닌 명백한 정치과정으로 규정하고 분노의 교육을 주장하였던 프레이리의 교육론, 그리스도를 전투적 해방자로 받아들인 해방신학, 그리고 공장과 농촌부문의 조직화를 중심에 두고 제도정치와 의회행동을 당의 직접적 결정에 귀속시키는 노동자당의 정치전략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삶의 틀 속에 담아내려는 ‘기초 공동체’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수도 브라질리아는 도시의 구조가 미래를 향하여 비상하는 제트기 형상.
모순의 땅, 브라질이 이끌어내고 극대화하여야 할 동력이 무엇인가.
그것은 높은 하늘에 있거나 아득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일 것이다.
브라질에 고질화된 낙천성과 우매함으로 인하여 좀처럼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하등의 가시적 성과도 이루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빛나는 달성이라고 불러야 옳다.
오로지 결과에 의하여 그 과정을 평가하고 거기에 쏟은 진솔한 노력들은 최소한의 의미마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류이고 실상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잠재력을 억압하고 이룩한 발전이라면, 그것을 희생시키고 이루어낸 발전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화려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기만이다.
땅을 기만하고 대지를 억압하고서 무엇을 뿌리내리고 길러낸다는 생각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부정함의 극치라 해야 할 것이다.
브라질의 광대한 땅에 묻혀 있을 동력을 만나는 일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
그러한 동력이 설사 용암처럼 지하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진로를 얻지 못하고 있을 것.
브라질은 광대한 땅이 오히려 더욱 무겁게 생각을 짓누르고 숨막히게 하는 억척같은 대지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어린 주인공 ‘제제’가 떠올랐다.
이 곳에서는 리마오렌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통 오렌지보다 열매도 작고 나무도 키가 작다. 소설속의 ‘제제’와 같다.
라임오렌지 나무는 아직도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라임오렌지나무는 제제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의 상징이면서 브라질의 현실이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루벌이가 1 달러에도 못미치는 생존한계선.
850만 평방키로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국토를 가진 나라에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300년간의 식민지 시대와, 독립후 200년간의 역사.
20세기에 들어와 줄곧 매진해 왔던 경제개발은 어디로 갔는가.
동유럽의 붕괴가 사회주의의 실패라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자본주의의 실패.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광복이라기보다는 分家.
우리의 역사의식으로 비추어볼 때, 타민족의 침략과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이 아니라, 계열사로서의 분리의 의미.
브라질의 경우, 황태자인 돈 페드로가 포르투칼 본국의 귀국명령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성격이 독립 이후 2세기에 걸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원주민과 흑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박해 그리고 고문과 처형과 쿠데타로 점철된 라틴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반세기 동안의 경제개발 정책의 종착점이 된 ‘종속화의 길’,
라틴아메리카의 태생적인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외세와 외국 자본의 하부에 예속된 정치권력과 그 하부에 다시 수많은 사람들은 내국식민지화하고 있는 ‘중층적 변방화’의 현실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비단 라틴아메리카만의 현실이 아닌지도 모르며, 우리 세기의 기본적인 세계질서인지도 모른다.
브라질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집단적 무의식. 삼바 카니발과 축구에 대한 열광, 무한한 낙천성.
인구의 70%가 문맹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임금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이유로 정책적으로 기피되고 줄곧 식민지 시대 이래의 우민화 정책이 답습되고 있는 것.
교육을 중립적인 지식의 주입이 아닌 명백한 정치과정으로 규정하고 분노의 교육을 주장하였던 프레이리의 교육론, 그리스도를 전투적 해방자로 받아들인 해방신학, 그리고 공장과 농촌부문의 조직화를 중심에 두고 제도정치와 의회행동을 당의 직접적 결정에 귀속시키는 노동자당의 정치전략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삶의 틀 속에 담아내려는 ‘기초 공동체’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수도 브라질리아는 도시의 구조가 미래를 향하여 비상하는 제트기 형상.
모순의 땅, 브라질이 이끌어내고 극대화하여야 할 동력이 무엇인가.
그것은 높은 하늘에 있거나 아득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일 것이다.
브라질에 고질화된 낙천성과 우매함으로 인하여 좀처럼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하등의 가시적 성과도 이루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빛나는 달성이라고 불러야 옳다.
오로지 결과에 의하여 그 과정을 평가하고 거기에 쏟은 진솔한 노력들은 최소한의 의미마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류이고 실상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잠재력을 억압하고 이룩한 발전이라면, 그것을 희생시키고 이루어낸 발전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화려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기만이다.
땅을 기만하고 대지를 억압하고서 무엇을 뿌리내리고 길러낸다는 생각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부정함의 극치라 해야 할 것이다.
브라질의 광대한 땅에 묻혀 있을 동력을 만나는 일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
그러한 동력이 설사 용암처럼 지하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진로를 얻지 못하고 있을 것.
브라질은 광대한 땅이 오히려 더욱 무겁게 생각을 짓누르고 숨막히게 하는 억척같은 대지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어린 주인공 ‘제제’가 떠올랐다.
이 곳에서는 리마오렌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통 오렌지보다 열매도 작고 나무도 키가 작다. 소설속의 ‘제제’와 같다.
라임오렌지 나무는 아직도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라임오렌지나무는 제제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의 상징이면서 브라질의 현실이었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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