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아프리카의 희망봉과 로벤섬---더불어 숲에서 19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5. 01:36
---半은 절반을 뜻하면서 동시에 同伴을 뜻합니다.(아프리카의 희망봉과 로벤섬)

‘지구의 끝’,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 대신에 왜 ‘희망봉’이라 하였을까.
희망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망의 섬’, ‘로벤섬‘, 해안에서 6마일, 뱃길로 3-40분 거리.
만델라 대통령이 27년 구속기간 중 17년을 갇혀 있던 감옥이 이 섬에 있다.
물개(Robbe)를 잡던 한적한 섬이, 아프리카 대륙이 식민지가 된 이후부터 사냥해 온 흑인들을 수용하는 섬이 되고, 다시 백인통치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흑인 지도자들을 감금하는 감옥이 된다.
희망봉과 절망의 섬이 지척에 있게 되었다.
지금은 ‘자유의 기념관’으로 바뀌고, 자유와 희망이 다시 가까이 있게 되었다.
화이트와 블랙은 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희망과 절망의 대명사였다.
희망은 절망의 땅에 피어나는 꽃인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의 희망이 누군가의 절망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망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환희의 동상’
전세계 금의 60%, 다이아몬드의 70%를 공급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용암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두려워지는 지하 3300미터, 섭씨 60도의 고열 속에서 암벽을 깨트리고 있는 흑인 소년들의 모습.
환희의 동상과 어둠 속의 흑인 소년들.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의 비탄이 되고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환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행정수도 ‘프레토리아’의 이민사 박물관.
‘피의 강 전투’를 조각한 아름다운 대리석 부조.
남아공 건국의 분수령이 된 ‘피의 강 전투’,
64대의 마차의 원진 속에서 550명의 이민자들이 1만 2천명의 줄루족 원주민들을 섬멸한 기적의 승리를 안겨주었던 전투.
누군가의 빛나는 승리가 다른 누군가의 처참한 패배가 아닐 수 없다면, 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남아공이 당면하고 있는 갈등이 결코 피부의 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의 충돌이라 할 것이다.

만델라 대통령의 유연한 화합의 정치 그리고 투투 주교의 ‘진실과 화해’의 노력이 실로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800만의 백인 가운데 400만이 흑인 대통령을 거부하면서 남아공을 떠나갔고, 남아 있는 백인들도 새로운 거주지역을 요새화하고 있다.
300년 동안 단 한 번도 동반자가 되기는커녕 일체의 교육과 문화로부터 격리되어 오로지 흑인 노동으로서만 의미를 부여받았던 식민과 억압의 과거가 이제 오늘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듣는 피아노 음률은 우리에게 흑과 백의 조화를, 그리고 반음과 온음의 조화를 깨닫게 해주었다.
피아노 음률은 흑백의 건반이 서로가 서로를 도움으로써 이루어내는 화음을 생각하게 하였고, 흑과 백의 대립뿐만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갈등에 관하여 생각하게 해주었다.
피아노는 우리에게 半音의 의미를 가르친다.
半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伴을, 同伴을 의미한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半과 伴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이 없어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對敵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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