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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묵호항 여객터미널에서(2)-----지고도 살아가야지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3. 22:11

---묵호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집에서 급하게 마신 우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학교가기 싫으면 배가 아프기도 한다는데, 그래서이었을까?
버스에 타자마자 속이 매스껍고 울렁거려서 걱정이 되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자랑하는 것이 나의 크고 튼튼한 위,위대한 ‘위’인데, 오늘따라 심통을 왜 부리시는가?

눈을 뜨고 나니 벌써 묵호항에 도착하였다.
아침 9시.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이제 매스껍던 배가 울렁거리지 않았다.
‘울렁울렁’ 대는 울릉도 가는 배를 앞에 두고 나의 울렁거리던 배가 항복을 해버린 것인가?
정신없이 3시간여를 차 속에서 잠을 자고 나니 이렇게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우리집 '그냥'의 완승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나를 따르라'
민들레는 어디 가고 새초롬한 동해 바다,묵호항이 베시시 웃고 있었다.

맞춤여행 일행은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21명.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온 50대 부부,
딸과 함께 온 50대 초반 여자,
또다른 효도 관광 가족,
어느 회사 장년 사원들 부부,
어느 60대 친구들 부부 등.

묵호항 여객선 터미널 식당에서 먹는, 늦은 아침식사는 국물이 시원한 생선찌게였다.
아무렇게나 편하게 섞여서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는 것이 퍽 자유스러웠다.
단체로 움직이는 국내여행이란 것이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모르는 사람들과 이렇게 어울려서 여행하는 것이, 나쁘지 않구나 싶었다.
지난번 동유럽 단체여행을 갔을 때하곤 또다른 분위기 아닌가?
국내와 해외여행의 차이일까 여행상품가격이 영향하는 어떤 차이일까?
분명 어떤 문화의 다름이 있었다.
서울과 광주의 택시손님?


묵호항 터미널 풍경은 우리가 사는 서울 냄새는 하나도 없었다.
왁자지껄 수더분한 시골장터나 시장바닥 냄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6-70년대의 기차역 분위기는 조금 있었다.
바닷가,
여객선이 드나드는 곳,
한창 바삐 돌아가야 하는 도시의 지하철과는 전혀 대조되는,
허술하기도 하고, 허름하기도 하고, 헐렁하기도 해 보였다.
이곳도 시간을 정해놓고 움직이는 곳인데도
쫓기지 않는 시간 속에들 있는 듯, 왠지 느긋하게 보이고 왠지 자유스러워 보였다.
조금은 어수선하였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고,
조금은 엉성하였지만 흐물거리지는 않았다.
바닷바람과 함께 사람이 살아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너무 ‘뻥’치는 것일까?
아마도 자유분방한 온갖 차림들이, 편안한 자유형 여행가방들이 사람들의 닫혀있던 마음을 어느새 아무도 모르게 저절로 열어버렸기 때문일 것인가?

너도나도 멀미약을 먹어대니 난들 어찌할 수가 없었다.
또 ‘깡’을 부려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지면서도 살아가야지, 나도 남들처럼 멀미약을 눈 찔끔 감고 둘러마셨다.
벌써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니 이 무슨 조화인가?
현실과 맞붙어서 끝까지 버티며 이겨나가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하면 몸과 마음이 평화로워지니, 이를 이제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나의 앞에는 이제 ‘울렁거릴’ 일이란 없게 되었다.

울릉도 가는 뱃길이 아무리 울렁거린다 해도 이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게 되었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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