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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흘 간의 만남(5)----욕망, 만질수록 커지는 괴물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3. 17:32
많이 길어유.
둘로 나눌까도 했는데 마땅치 않아서......
죄송하구만유.

천천히 일요일까지 읽으셔요.



-----욕망, 만질수록 커지는 괴물
통신과 교통의 발달 그리고 문명의 이기들.
인간이 살아가는데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았는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곳, 미얀마.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행복을 느낀다.
적게 갖는 것으로 행복해 하는 ‘소욕지족’을 실천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에서 무소유를 말하는 것은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서 오는 집착을 끊으라는 것.
인간은 항상 모든 것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데서 온갖 탐욕적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 지나친 집착에서 오는 소유를 줄여야 편안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시계가 두 개 세 개 있어봐야 결국은 손목에 차는 것은 한 개뿐 아닌가.
그런데도 두 개, 세 개를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고, 어리석은 짓 아닌가.

히말라야 산을 황금으로 둔갑시키고 다시 그것을 두 배로 늘린다 해도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그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다.
무소유란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
돈은 벌어야 하지만 정당하게 벌고 정당하게 써야 한다.

‘허유세이’의 고사.
중국의 요임금이 순임금한테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허유에게 천하를 다스려달라고 부탁했다.
허유는 ‘구질구질한 말을 들었으니 내 귀가 더러워졌다’며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친구 소부는 ‘은자는 은자라는 이름조차 밖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면서 망아지를 끌고 상류에 올라가 물을 먹였다. 허유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망아지에게 먹일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한다.

불교에서 무소유를 말하는 것을 들으면 때로는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욕망이나 집착의 문제를 너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
사실 모든 생명이란 다 조금씩 욕심이 있다.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욕심 아닌가.
일 욕심도 있고 공부 욕심도 있다.

정정진.
정직하게 행동하고 그래서 남한테 피해도 주지 않고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바른 생각으로 바르게 노력해 나가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탐진치 삼독.
탐욕, 증오 그리고 어리석은 망상.
문제는 이 탐욕이 왜 오느냐 하면 무명 즉 지혜롭지 못하다, 미혹하다는 뜻.
왜 지혜롭지 못한가,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지적하는 인생의 현실 세 가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제행무상은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고 변해 간다,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 가듯이 모든 만물은 그렇게 변해 간다는 것.
제법무아는 이렇게 변하는 존재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만약 어떤 것도 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변하지 않겠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것. 가장 단단한 금강석도 변하는 물질이다.
일체개고; 이렇게 모든 것이 변하고 실체가 없으니 이는 괴로운 존재, 이것이 우리가 처해있는 냉정한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원할 것으로 알고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통을 즐거움으로 착각한다.
어리석은 생각이고 지혜롭지 못한 생각 아닌가.
이런 상태를 무명이라 한다. 다시말하면 우리는 무명의 현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이기적 탐욕의 노예가 된다는 것.
불교는 종교적 깨달음을 통해 무명을 걷어 냄으로써 인생을 바르게 보는 안목을 열어 주고자 한다.
또한 종교적 수련을 통하여 삼독을 제거함으로써 집착에서 생기는 고통을 소멸시키고 완전한 행복을 성취시키고자 하는 것.

그러나 인간이란 숙명적으로 그 삼독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사실 모든 인간의 불행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할 이유와 그 방법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 반대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작은 티베트’ 라는 인도의 라다크, ‘이것이 진짜 사람이 사는 세상이구나’ ‘이곳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며 사람을 중히 여기고, 공동체적인 삶을 아주 잘 영위하고 있다’
5 년이 지난 뒤, 라다크의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청바지를 입고, 달라를 달라고 손을 내밀고, 여자들은 술집에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10 년이 지난 뒤, 다른 후진 자본주의 사회와 똑같이 달라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돈벌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당신들은 행복하냐고 물으면 아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욕망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가를 말해 주는 좋은 예.

욕망은 이렇게 만지면 만질수록 커지는 괴물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을 억제할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한 번 욕심을 부리고 좋은 것을 맛보면 점점 강도가 높아져야지 낮아지게 되면 불행을 느끼게 된다.
가난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잘살다가 못살게 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죽는 일이 더 많다는 것.
‘불가득’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고 소유할 수 없다.

성철 스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산수수.
산시비산 수시비수
산시산 수시수.

고려의 나옹선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욕망과 소유 그리고 행복의 삼각관계.
무한대로 소유하고 무한대로 소비한다고 행복한가?
그렇게 할수록 우리는 더욱 탐욕에 목마르게 될 뿐 아닌가.
소비지수가 곧 행복지수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욕심을 줄이고 소비를 최소화함으로써 정신적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소비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도시인들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몽상으로 비칠 것이지만,...........?
많이 비우면 비울수록 자유롭고 즐거운 삶도 있다.
너무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생활태도를 바꾸어 보면 어떨까?

물질주의적 경제논리가 추구해 온 세속적 경제논리의 기둥은 소비의 극대화와 이를 위한 무제한적 재화의 축적.
사람들은 이러한 소비경제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극도의 긴장과 압박의 굴레에서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네 것도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으로 여기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간다.
사람들은 경제적 소외와 좌절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는 마침내 재화의 축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형태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극대화된 소비경제의 구조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욕망과 소비를 줄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종은 속을 비워야 그 소리를 멀리 보내고, 강물은 아래로 흘러야 바다에 이른다’
채우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비우고 내려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 될 수도 있다.

무조건 가난하게 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가난해도 30 년 전에 비하면 엄청난 부자이다.
깨끗하고 바르게 살면 소박하지만 깨끗한 행복이 찾아온다.
그렇게 하면 그가 울리는 행복의 종소리는 더 멀리 울릴 것이고, 그가 만나는 바다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바다가 될 것이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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