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밥 줄`-----관악산에서(끝)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1. 21:17
서울대로 회군하느냐, 안양 쪽으로 넘어가느냐. 다시 갈림길이 나왔다.
동화 속에 나옴직한 할머니가 갈림길에서 산 속의 햇볕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호박엿을 묻히면서 오물오물 연신 입운동을 하고 계셨다. 아마도 어릴적 우리들 할머니처럼 없는 이 때문에 합죽거리는 것이려니.
나를 보고 무엇인가 물어보라는 시늉이었다.
‘‘삼막사는 어느 쪽이나요?‘’
‘..........’
듣는 둥 마는 둥 턱만 방향을 전하고 호박엿을 내게 들어올렸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모두 내놓으니 호박엿 네 조각을 주면서 ‘그냥 많이 주는 거여’ 하셨다.
드디어 삼막사, 오후 1시경.
긴 줄이 눈앞에 보였다.
한 100미터는 족히 되고도 남았다.
‘무슨 줄이야?’
‘밥줄’
‘밥줄’이라는 표현이 발랄하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신랄함에 난 그 친구를 다시 보았다.
우리말이란 것이 쓰임새에 따라 얼마나 맛이 다른가.
나도 그 줄 ‘밥줄’에 섰다. 실은 알고 보니 밥줄이 아니고 그것은 절에서 점심 공양으로 국수를 주는 '국수줄'이었다.
거북바위 근처에서 비빔밥 한 그릇을 해치웠지만 조금 섭섭하던 차, 잘 되었다 싶었다.
그냥 사람 속에 서있으면서, 그것도 밥을 타먹기 위하여 줄을 서본다는 것은, 나의 지금 일상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파격.
오래 전 비인간적 군대생활의 줄이 떠오르기도 하고, 조금 가까이는 예비군 훈련의 강제적 줄도 있었고, 철이 들어 사회생활 곳곳에서 만나는 많고 많은 줄, 줄, 줄들이 오늘의 줄과 줄줄이 겹쳐서 떠올랐다.
가끔 절의 점심 공양을 먹어보면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우선 줄을 서서 상당기간 기다려야 하는데도 그것은 다른 줄과 달리 기다린다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전혀 싫지 않다.
먼 산을 쳐다보기도 하고 가까운 산 주변을 주욱 훑어보기도 하면서, 이것저것 편하게 생각할 수가 있어 좋다. 구속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니 이 역설이 또 좋다.
밥을 먹고 나서 스스로 깨끗하게 그릇을 씻어야 하는 것도 재미있다. 일상적으로 하지 않은 일을 하니, 더욱이 스스로 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는 것이니, 나이 들었다고 체면부릴 일 없어 좋고, 전혀 쑥스럽지 않아 좋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공짜로 밥을 먹는다는 것.
공짜 싫어하는 사람 없다고 절의 점심공양을 먹으면 왠지 크게 무엇을 얻었다 싶고 그냥 기분이 좋다.
나도 이런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경험하게 할 수는 없을까.
전혀 비굴하지 않으면서, 아니 오히려 기분 좋게 밥을 얻어먹고, 똑같은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만나게 할 수는 없을까,
부처님의 점심공양이 그냥 공짜가 아니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불심이란 것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쪽에서 채워진 것을 베풀면서 비우면, 다른 쪽은 받으면서 채우고 그리고 베푸는 것을 배우는 것.‘, 아닐까.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 저 멀리 저 깊은 불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짜 점심 ‘밥줄’에 있었으니, 나는 오늘 점심 잘 먹은 것이었다.
하산길을 어느 쪽으로 할까.
익숙한 곳이야 서울대 방향이겠으나, 오랜만에 가보지 않은 길, 안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관악역이라는 이정표가 보이긴 하였지만 초행이라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스팔트가 알기 쉽게 틀림없을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왠지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후의 햇볕이 아스팔트와 만나 숨을 틀어막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5월의 푸르른 기분이 아스팔트 위에서는 금방 숨넘어갈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정말 또다시 산에서 아스팔트길을 우리는 만나야 하는 것인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인지, 멈칫거리는 나에게 샛길 같은 것이 보였다.
이런 곳에 이런 길이 있다니, 올라오면서 만났던 길과는 또다른, 꿈길 같은 길이었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가 저절로 다시 읊어지는 길이었다. 늦은 5월의 오후 햇볕과 숲 속의 푸르름이 알맞게 조화를 부리면 이런 경치가 연출되는 것일까.
무지 황홀하였다. ‘무릉도원’이라고 뻥을 쎄게 쳐도 좋을까 싶었다.
걸어가는 발바닥 밑에 밟히는 느낌이라니, 촉촉하면서 살갑게 달라붙는 즐거움이었다. 시루떡, 막 구어낸 시루떡 위의 고물을 만지는 감촉이랄까 따끈따끈하면서 고실고실하면서 손 끝에 달라붙는, 입 속에 들어가면 살살 녹아내는 그 느낌, 같은 산 속 숲길이었다.
엊그제 비가 온 뒤여서일까, 산길이 알맞게 물기를 머금어 오늘 오신 산행객들에게 귀한 맛, 귀한 느낌을 선물하는 것이리라.
더 이상 걸어가지 않고 그냥 아무데나 나는 주저앉고 싶었다. 거기에 또 계곡물이 좔좔 아니 촐졸촐졸 흐르지 않는가. 이곳저곳 더 예쁜 돌이 없는지 따졌을 것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돌이 좀 매끄럽지 않으면 어떠리. 어서 빨리 계곡물에 발을 담궈 이 꿈길 산 속을 더 맛보아야지 조바심내며 밋밋한 바위 위에 털썩 자리를 깔았다.
늦은 5월이지만 계곡물은 아직 차가웠다. 물속으로 들어간 나의 두발은 깜짝 놀라 소리치는 듯하였다.
‘어, 차가우나 시원하다.‘
3 시간여의 피로와 땀이 단번에 날아갔다.
발바닥의 물기를 말리려고 자리잡은 바위를 난 야전침대로 만들고 배낭을 베개로 삼으니 곧 산속의 낮잠이 찾아왔다. 누가 이보다 더 폼 잡을 수 있으리오.
재벌의 할아버지든, 소위 우리 속세에서 잘 나가는 삼관왕이든, 빳빳거리는 우리들의 사.사.사.사님들이든 부러워할 일 하나도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이 날 시새움하지 않을까.
얼핏 소란스러움 있어 짧은 잠에서 깼다. 젊은 부부들이었는데, 막걸리병을 흔들다 너무 흔들었는지 거품이 쏟아져 난리를 낸 것이었다. 알맞게 흔들어 알맞게 거품을 빼야하는 것인데, 나처럼 흔들기만 오래 하였던 모양이었다. 수도관이 터지듯 솟구치는 막걸리를 어찌 손으로 감당하리.
어,어,어, 하는 사이에 병 속의 막걸리는 한 컵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한 쌍은 날아가 버린 막걸리에 아쉬워 어쩔 줄 모르고, 또 다른 한 쌍은 막걸리를 날려보낸 갑작스런 미안함에 또 어쩔 줄 모르더라. 이를 어쩌나, 그래도 한 사람은 못내 미련이 남는지 남아있는 막걸리를 컵에 따르고 또 딸아 입맛을 다시고 또 다시더라. 안주만 푸짐하게 남아 그들은 본의 아니게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하였더라.
주섬주섬 배낭을 다시 챙기고 얼마 남지 않을 하산길을 재촉하였는데 길은 여전히 꿈 속같은 그 숲길이었으며, 발바닥에 와 닿는 감촉은 더 가뿐하고 뽀송뽀송하였다.
젖은 기저귀를 갈아 낀 다음의 갓난아기가 맛보는 느낌이 그러할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어느새 꿈길 같던 숲길은 사라지고 갑작스레 황량하기만 한 공사판이 소란스럽게 나타났다.
천당과 지옥의 차이라더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꿈길 같던 숲길은 어디 가고 삭막한 속세가 떡 버티고 서 있단 말인가.
어디서 이 많은 자동차들은 모였으며, 저 괴물 같은 공사판은 무엇인가. 산을 깎았는지 들판을 뒤집었는지 사방이 온통 난장판 아닌가.
공사판의 안내문에서 이곳이 행정구역으로 안양시 만안구인데, 그러면 관악 전철역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좋기만 하던 꿈 속 같던 숲길이 마지막에 와서 속세의 심란한 난장판으로 변하여 난감해졌다.
‘빨리 더 빨리’
‘많이 더 많이’
아직도 우리에겐 인간과 자연을 조화롭게 만나게 하는 여유가 없는가.
꿈길이 현실과 만나서 우리 인간들을 더 활기차고 더 편안하게 만들어내는 지혜는 없는 것인가.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제대로 일을 꾸며 나가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는 꿈속 같던 숲길과 시끄러운 속세가 함께,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져 있기를 기대해본다. 오늘 맛본 거북바위에서의 비빔밥 같은 전혀 새로운 예술작품이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그 날이 언제 오실 것인가.
동화 속에 나옴직한 할머니가 갈림길에서 산 속의 햇볕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호박엿을 묻히면서 오물오물 연신 입운동을 하고 계셨다. 아마도 어릴적 우리들 할머니처럼 없는 이 때문에 합죽거리는 것이려니.
나를 보고 무엇인가 물어보라는 시늉이었다.
‘‘삼막사는 어느 쪽이나요?‘’
‘..........’
듣는 둥 마는 둥 턱만 방향을 전하고 호박엿을 내게 들어올렸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모두 내놓으니 호박엿 네 조각을 주면서 ‘그냥 많이 주는 거여’ 하셨다.
드디어 삼막사, 오후 1시경.
긴 줄이 눈앞에 보였다.
한 100미터는 족히 되고도 남았다.
‘무슨 줄이야?’
‘밥줄’
‘밥줄’이라는 표현이 발랄하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신랄함에 난 그 친구를 다시 보았다.
우리말이란 것이 쓰임새에 따라 얼마나 맛이 다른가.
나도 그 줄 ‘밥줄’에 섰다. 실은 알고 보니 밥줄이 아니고 그것은 절에서 점심 공양으로 국수를 주는 '국수줄'이었다.
거북바위 근처에서 비빔밥 한 그릇을 해치웠지만 조금 섭섭하던 차, 잘 되었다 싶었다.
그냥 사람 속에 서있으면서, 그것도 밥을 타먹기 위하여 줄을 서본다는 것은, 나의 지금 일상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파격.
오래 전 비인간적 군대생활의 줄이 떠오르기도 하고, 조금 가까이는 예비군 훈련의 강제적 줄도 있었고, 철이 들어 사회생활 곳곳에서 만나는 많고 많은 줄, 줄, 줄들이 오늘의 줄과 줄줄이 겹쳐서 떠올랐다.
가끔 절의 점심 공양을 먹어보면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우선 줄을 서서 상당기간 기다려야 하는데도 그것은 다른 줄과 달리 기다린다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전혀 싫지 않다.
먼 산을 쳐다보기도 하고 가까운 산 주변을 주욱 훑어보기도 하면서, 이것저것 편하게 생각할 수가 있어 좋다. 구속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니 이 역설이 또 좋다.
밥을 먹고 나서 스스로 깨끗하게 그릇을 씻어야 하는 것도 재미있다. 일상적으로 하지 않은 일을 하니, 더욱이 스스로 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는 것이니, 나이 들었다고 체면부릴 일 없어 좋고, 전혀 쑥스럽지 않아 좋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공짜로 밥을 먹는다는 것.
공짜 싫어하는 사람 없다고 절의 점심공양을 먹으면 왠지 크게 무엇을 얻었다 싶고 그냥 기분이 좋다.
나도 이런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경험하게 할 수는 없을까.
전혀 비굴하지 않으면서, 아니 오히려 기분 좋게 밥을 얻어먹고, 똑같은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만나게 할 수는 없을까,
부처님의 점심공양이 그냥 공짜가 아니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불심이란 것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쪽에서 채워진 것을 베풀면서 비우면, 다른 쪽은 받으면서 채우고 그리고 베푸는 것을 배우는 것.‘, 아닐까.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 저 멀리 저 깊은 불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짜 점심 ‘밥줄’에 있었으니, 나는 오늘 점심 잘 먹은 것이었다.
하산길을 어느 쪽으로 할까.
익숙한 곳이야 서울대 방향이겠으나, 오랜만에 가보지 않은 길, 안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관악역이라는 이정표가 보이긴 하였지만 초행이라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스팔트가 알기 쉽게 틀림없을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왠지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후의 햇볕이 아스팔트와 만나 숨을 틀어막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5월의 푸르른 기분이 아스팔트 위에서는 금방 숨넘어갈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정말 또다시 산에서 아스팔트길을 우리는 만나야 하는 것인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인지, 멈칫거리는 나에게 샛길 같은 것이 보였다.
이런 곳에 이런 길이 있다니, 올라오면서 만났던 길과는 또다른, 꿈길 같은 길이었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가 저절로 다시 읊어지는 길이었다. 늦은 5월의 오후 햇볕과 숲 속의 푸르름이 알맞게 조화를 부리면 이런 경치가 연출되는 것일까.
무지 황홀하였다. ‘무릉도원’이라고 뻥을 쎄게 쳐도 좋을까 싶었다.
걸어가는 발바닥 밑에 밟히는 느낌이라니, 촉촉하면서 살갑게 달라붙는 즐거움이었다. 시루떡, 막 구어낸 시루떡 위의 고물을 만지는 감촉이랄까 따끈따끈하면서 고실고실하면서 손 끝에 달라붙는, 입 속에 들어가면 살살 녹아내는 그 느낌, 같은 산 속 숲길이었다.
엊그제 비가 온 뒤여서일까, 산길이 알맞게 물기를 머금어 오늘 오신 산행객들에게 귀한 맛, 귀한 느낌을 선물하는 것이리라.
더 이상 걸어가지 않고 그냥 아무데나 나는 주저앉고 싶었다. 거기에 또 계곡물이 좔좔 아니 촐졸촐졸 흐르지 않는가. 이곳저곳 더 예쁜 돌이 없는지 따졌을 것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돌이 좀 매끄럽지 않으면 어떠리. 어서 빨리 계곡물에 발을 담궈 이 꿈길 산 속을 더 맛보아야지 조바심내며 밋밋한 바위 위에 털썩 자리를 깔았다.
늦은 5월이지만 계곡물은 아직 차가웠다. 물속으로 들어간 나의 두발은 깜짝 놀라 소리치는 듯하였다.
‘어, 차가우나 시원하다.‘
3 시간여의 피로와 땀이 단번에 날아갔다.
발바닥의 물기를 말리려고 자리잡은 바위를 난 야전침대로 만들고 배낭을 베개로 삼으니 곧 산속의 낮잠이 찾아왔다. 누가 이보다 더 폼 잡을 수 있으리오.
재벌의 할아버지든, 소위 우리 속세에서 잘 나가는 삼관왕이든, 빳빳거리는 우리들의 사.사.사.사님들이든 부러워할 일 하나도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이 날 시새움하지 않을까.
얼핏 소란스러움 있어 짧은 잠에서 깼다. 젊은 부부들이었는데, 막걸리병을 흔들다 너무 흔들었는지 거품이 쏟아져 난리를 낸 것이었다. 알맞게 흔들어 알맞게 거품을 빼야하는 것인데, 나처럼 흔들기만 오래 하였던 모양이었다. 수도관이 터지듯 솟구치는 막걸리를 어찌 손으로 감당하리.
어,어,어, 하는 사이에 병 속의 막걸리는 한 컵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한 쌍은 날아가 버린 막걸리에 아쉬워 어쩔 줄 모르고, 또 다른 한 쌍은 막걸리를 날려보낸 갑작스런 미안함에 또 어쩔 줄 모르더라. 이를 어쩌나, 그래도 한 사람은 못내 미련이 남는지 남아있는 막걸리를 컵에 따르고 또 딸아 입맛을 다시고 또 다시더라. 안주만 푸짐하게 남아 그들은 본의 아니게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하였더라.
주섬주섬 배낭을 다시 챙기고 얼마 남지 않을 하산길을 재촉하였는데 길은 여전히 꿈 속같은 그 숲길이었으며, 발바닥에 와 닿는 감촉은 더 가뿐하고 뽀송뽀송하였다.
젖은 기저귀를 갈아 낀 다음의 갓난아기가 맛보는 느낌이 그러할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어느새 꿈길 같던 숲길은 사라지고 갑작스레 황량하기만 한 공사판이 소란스럽게 나타났다.
천당과 지옥의 차이라더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꿈길 같던 숲길은 어디 가고 삭막한 속세가 떡 버티고 서 있단 말인가.
어디서 이 많은 자동차들은 모였으며, 저 괴물 같은 공사판은 무엇인가. 산을 깎았는지 들판을 뒤집었는지 사방이 온통 난장판 아닌가.
공사판의 안내문에서 이곳이 행정구역으로 안양시 만안구인데, 그러면 관악 전철역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좋기만 하던 꿈 속 같던 숲길이 마지막에 와서 속세의 심란한 난장판으로 변하여 난감해졌다.
‘빨리 더 빨리’
‘많이 더 많이’
아직도 우리에겐 인간과 자연을 조화롭게 만나게 하는 여유가 없는가.
꿈길이 현실과 만나서 우리 인간들을 더 활기차고 더 편안하게 만들어내는 지혜는 없는 것인가.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제대로 일을 꾸며 나가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는 꿈속 같던 숲길과 시끄러운 속세가 함께,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져 있기를 기대해본다. 오늘 맛본 거북바위에서의 비빔밥 같은 전혀 새로운 예술작품이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그 날이 언제 오실 것인가.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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