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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관악산에서(2)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1. 21:09

연주암으로 갈까 삼막사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많이들 가지 않은 길 삼막사 쪽으로 길을 틀었다.
‘자연 관찰로’는 벌써 찾아온 유치원 병아리들로 가득, 숲들도 재잘재잘 소리내는 듯 하였다.
요즈음 자연공부는 저렇게 시키는지 마뜩치 않았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과 같이 배워야지 억지로 틀 속에 집어넣으려 하고 있어서, 나무이름을 말하라 삼행시를 지어보셔요 하는 것이 여간 거슬리지 않았지만, 어찌하랴 우리 사는 세상에는 ‘팻숀’이라는 것이 있어 제때 따르지 않으면 큰 병이 나는 줄 알지 않던가.

남의 일에 시비하는 못된 버릇이 다시 살아날 겨를도 없이 난 어느 사이 황홀한 숲길에 폭 빠지고 말았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하는 그 꿈길 같은 길이 내 앞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떠는가 내가 너무 헤픈 것인가, 늦은 5월의 푸르른 관악이 햇볕과 어우러져 나의 혼을 흔들어대는 것이리라.

때죽나무를 아시는가요? 그 꽃을 보셨는지요? 다섯 꽃잎이 너무 수줍어 하고 있대요. 촉촉 솟아있는 꽃술은 곧 지고 말 것을 아는지라 보란 듯이 의젓하더이다.
난 어릴 적 이 때죽나무를 끊어 잘라서 윷놀이를 하였더니 하는 생각이 들자 그 꽃은 더 아름답게 옛날로 돌아가는 듯 하더이다.

미음완보.
옛 시인의 노래를 읊조리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느리게는 걸으면서 꿈속만 같은 이 숲길이 더디게 끝나기를 바랐지만,
숲길도 길이었지요,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길은 끝나게 되어 있는 것, 곧 끝이 나고 말았으니까요.

가파른 길이 없으면 어디 산이라 하겠는가,
황홀하기만 하던 숲길이 이제 멀어지더니 숨을 몰아붙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왔다.
낑낑대며 나를 다스리고 있노라니 누군가 내 손목을 확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나도 놀라고 누군가 상대방도 놀라더라. 누군가는 수줍은 아줌마, 숨을 몰아쉬다 발을 헛디뎌 아무거나 잡다보니 옆의 내 손목을 만지게 되었더라.
산에 오니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재미있지 않은가.
어디 여염집 아낙네가 낯선 외간 남정네의 손목을 잡다니............

역사는 움직여 봐야 하느니, 방안에 쳐 박혀 있지 말고 밖으로 산으로 쏘다니거라들, 어떤 역사를 원한다면, 동즉득 ‘움직여야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어떤 역사는 오지 않았더라.

더 이상 직진을 하면 낭떠러지, 우회전이 강요되는 갈림길에서 난 잠시 숨을 골랐다.
저 멀리 보이는 반대편이 사당동에서 올라오는 바윗길이려니, 그 위로 더 위로 오르면 연주대, 그 능선과 내가 서있는 곳 사이를 연결하는 직선 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늦은 5월의 푸르름만이 따가운 햇볕아래 가득할 뿐.
시야가 시쳇말로 죽이도록 끝내주었다. 난 잠시 멍하니 죽어 있다가 가던 길을 가기 위해 우회전하였다.

이크, 드디어 예의 바윗길.
맨손으로 그냥 오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찌하리, 장갑을 꺼내기는 싫고.........
사람은 왜 이리 그렇게 많이 오셨는지, 기다리며 올라야하는 바윗덩어리들은 계속 날 시험들게 하였다.
꽤나 어려운 문제들도 나오기도 하여서 자칫 건방떨어 방심하면 앗뿔싸.
난 실족하지 않도록 비겁한 사람이 되어 맹조심하여야 했다.
얼핏 방심하는 사이 머리를 들어서는 안 되는 곳에서 ‘거두’하고 말았으니, 바윗덩어리를 들어올리려 하였으니, ‘아이고, 아파’ 였다.
내 머리가 이미 돌이 되어 굳어 있었기 망정이지 잘 돌아가는 청춘이었다면 정말 박살이 날 뻔하였다.

거북바위 근처에는 인간들의 세상,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죽어도 먹고는 살아가야 하는 상인들과 먹고 더 잘 살고자하는 산행객들과의 만남이었다. 소란스러웠지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세상에 먹는 것 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을까.
‘먹기 위하여 사느냐, 살기 위하여 먹느냐’
최소한 한낮이 지난 이곳 산에서는 ‘먹기 위하여 산다’ 가 정답일 것이었다.

가파른 고갯길을 지나 바윗덩어리 타고 넘어온 사람들에게는 ‘뵈는 게 없다’
오로지 뵈는 것은, 갈증을 풀어줄 막걸리와 허기짐을 채워줄 한 주먹의 밥, 이 때는 아름다운 여인도 다음 다음으로 밀린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확 들어오는 것들은 편안한 막걸리와 먹음직스런 비빔밥 그리고 펑퍼짐하게 널려있는 갖가지 나물들 안주들.
평평하고 좋아 보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돗자리가 있었고 그 곳에는 이미 인간들의 세상, 먹고 마시고 떠들고 또 몇몇은 잠도 자고, 천국이 따로 없었다.

허기진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리.
막걸리 한 사발 그리고 비빔밥!
비주류인 내게도 산 위에 올라 마시는 막걸리는 왕켚, 세상이 모두 오늘 내 것이 되었다.
서로 다른 것들을 비벼서 곧 새로운 하나로 만들어내는 예술, 숲속의 비빔밥은 꿀, 세상의 달콤함이 오늘 그 속에 있었다.
산중진미가 따로 없었다.
돗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니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푸르다 하얀 구름들이 한가롭고, 5월의 하늘도 높기만 하였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리’
오늘따라 옛 시인의 노래가 ‘딱’이었다.
비빔밥 만들어 먹고 막걸리 마시고 돗자리 위에 누웠으니 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계속)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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