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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2월 첫 날에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0. 23:21
2003.12.1.월.
벌써 달력이 마지막 장만 남기고 있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이 뜯기면 또 새해가 온다.
해가 바뀌는 것은 하루의 날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듯, 항용 만나는 하나의 바뀜처럼
한편으로는 새롭기도 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인데........
맨 날 같은 것이 반복되어 지루한 것보다는, 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실은 어제와 똑같은 다른 하루가 오는 것인데......,
우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여 '새해'라고 하지 않은가.

지금은 그 한해의 무게가 여느 때보다 더 무겁게, 그 하나를 더할 것이다.
우리들 일컬어 5학년 3반 또는 5학년 4반이 되는 것이니, 이 무게를 던져버릴 수는 없는가.
오늘따라 날씨가 스산하게 을씨년스럽다. 잔뜩 찌푸려 사랑탐을 하려는가.
금방 무슨 심술을 부리려는가, 한바탕 눈이라도 쏟아내면 한 장 남은 달력이 덜 미안해 할지도 모를 터인데.

지난 26일 광주에 내려간 사이에 녀석은 입대 100일째 기념, 4박 5일 휴가를 나왔다.
새벽에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거나 하여 4일 동안 녀석의 낯짝을 볼 수가 있어야지, 큰 놈이 했던 대로, 넙죽 큰 절 받기를 내심 기대했는데, 녀석이 좀체 기회를 주지 않더니,
마지막 날 낮에 들어와서는 큰 절을 하긴 하였다.
허우대가 훨씬 커진 거 같다는 에미의 느낌이 있었지만, 내게는 아직도 물렁물렁하고 어설프기만 해 보였다. 언제 단단해지고 밥값을 할까.

'대월'이가 썼다는 시 한 수 읊어 보라 해도 히죽히죽 웃기만 할 뿐, 고뇌의 시는 쓰지 않은 거 같고, 괜히 애비에미 딴생각 못하게 웃겨서 공갈친 거고 결국 우리부부는 속없이 속고 말았다 싶었다.
9학기를 등록하고도 졸업도 못한 학교가 무엇이길래 휴가 내내 학교만 가는지, 30여년 전으로 나를 돌려놓았다.
입대 하기전 길거리의 할머니에게서 사왔다는 '서강이' 강아지도 제법 컸다고 하였다.
우리 집에서 별식으로 젖을 떼었던 '서강이'가 학생회 사무실에서 귀염둥이가 되었다니 세월은 그렇게 소리없이 지나가고 커가는 것인데, 오늘 난 세월을 너무 심각하게 다루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일요일 아침 일찍, 별로 어울리지 않는 군복을 입고, 서둘러 떠나는 녀석이 큰 애 때만큼 씁쓸하지 않다니 어찌된 노릇일까.
둘째라서? 이미 한번 겪었으니까? 글쎄, 무덤덤하게 녀석을 다시 떠나 보냈다.
우리들은 떠나고 보내는 의식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입대하는 다짐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보초서는 시간만큼 자유로운 시간들이 다시는 오지 않으니 끝없는 상상의 시간을, 자유의 시간을 거기서 만나라고, 그러면 2년이 곧 끝날 것이라고, 잔소리 잔소리 또 하여 보냈다.
녀석은 귓등으로 잔소리들을 넘기고 훌쩍 서울을 떠났다.

어느 날, 녀석은 '대월'같은 시 하나를 써서 큰 절을 다시 할 것이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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