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지리산 산행후기(2)/지리산은 그냥 그대로 있었는데...........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0. 22:48
2. 지리산은 그냥 그대로 있었는데..............
콜벤의 운전수는 거칠고 또 거칠었다.
그는 닳고 닳아서 손님들을 가지고 놀았다.
지리산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수준에 운전수가 맞추어 버릇한 결과인지,
아니면 이곳에 오는 모두가 운전수의 수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인지,
잠시 나는 헷갈렸는데 운전수는 계속 거칠게 말하면서 거칠게 운전하였다.
오늘의 정치수준이 우리들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곳을 찾는 산행객들이 우선 빨리 달려 올라가서 빨리 지리산 구경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리라.
손님들 속마음이 어서 빨리 가서 어서 빨리 산행행사를 마치고싶어서일 건데,
거칠게 빨리 달리는 운전수만을 나무라서 무엇하겠는가.
보통 성삼재까지는 40분 정도 걸리는데 자신은 20분, 때로는 15분에도 갈 수 있다고 자랑하였는데..
내게는 겁주는 것으로 들렸다.
어찌나 미운지 콱 쥐어박고 싶었지만 모두의 안전과 모처럼 산행이 방해를 받을까 봐서 참고 또 참았다.
우리가 빨리 달리기 경주를 하러 온 것이 아닌데,
가을날 아침 이른 시각에 지리산을 휘감으며 천천히 올라가면서 산을 눈아래로 둘러보고 산냄새를 맡아가면서 오르면 이 또한 별미일 것인데, 운전수는 우리의 수준을 천박하게 빨리빨리병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출발한 곳이 표고 700 미터 수준,
꾸불꾸불 산자락을 돌면서 가을아침을 들여다보았어야 했는데,
차가 혹시 넘어지지는 않을까 아찔아찔하게 마음을 졸이며 20분만에 1100 미터 고지의 성삼재에 닿았다.
성삼재는 시골 장바닥보다 더 시끌와글.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들이 모였는가.
남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왔다는 증명사진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은가.
미운 운전수를 불러 한방 박게 만들었다.
잘 박았을까. 차 몰 듯이 거칠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노고단까지는 보통 걸음으로 40 여분.
우리는 마음대로 천천히 걸어서 1 시간 여만에 여유롭게 老姑壇, 해발 1507 미터,를 만났다.
반야봉 1751, 천왕봉 1950 미터와 함께 지리산 3대 주봉 중의 하나.
산신령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
그러나 사방이 허허롭기만 하고 하늘이 펑 열려만 있지 특별한 볼품은 없었다.
8년 전 이 길을 난 구두를 신고 올랐었는데 오늘 그 비포장길은 거의 사라지고 알맞은 돌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노고단의 약수물은 여전히 지리산의 정기를 내주듯 쭐쭐줄 흐르고 우리는 흘린 땀만큼 그 물을 우리의 입안으로, 그 정기를 우리의 몸 속으로 채워 넣었다.
노고단은 지리산 종주가 시작되는 서쪽 끝, 동쪽 끝 천왕봉까지 25.5 키로.
잘 준비된 산꾼들이 3일 걸려 완주한다는데, 언감생심 우리들은 그 맛을 살짝 보다가 임걸령에서 피아골로 하산길을 잡았다.
임걸령까지 가는 첫 2 키로는 좁디좁은 외길의 산길. 종주하는 산꾼들의 발걸음은 바람소리를 내며 우리의 소걸음을 재촉하였다.
고지 산등성이의 가냘픈 나무들을 좀 더 들여다 보고싶은데, 단풍이 들었는지 냄새도 맡고싶은데 바쁘게 내딛는 걸음들에 마음이 쫓기고 말았다.
유난히 키 작은 대나무 잎과 철쭉 같은 앉은뱅이 나무들이 우리들의 발길에 채이고, 활엽수는 물론 침엽수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표고에 따른 식물들의 생태일 것이다.
임걸령가는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이는 지리산은 농염한 여인 같은 단풍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검푸른 바탕 위에 붉은 반점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우리들 인생의 나이테로 치면 이제 막 사춘기.
단풍은 이제 막 자리잡아 가는 듯하였다. 지리산은 10월말이나 11월초쯤 되어야 만산홍엽일 것이라는 말이 맞았다.
하얀 덩어리의 운해가 저멀리 골짜기에 걸쳐 있어 우리가 지금 큰 산에 와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 아래가 화엄사, 오른쪽으로는 무등산, 그러나 시야에 무등산은 들어오지는 않았다.
노고단에서 1 시간 여, 임걸령에 닿아 피아골로 내려가는 길목, 피아골 삼거리.
정환이는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양반걸음으로는 피아골 내리막길을 3 시간 여에 끝내기에는 무리. 그 혼자만 마음과 발걸음이 빨라지는 듯 하였다.
수남은 내색하지는 않으나 정환이의 걸음에 맞추느라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리라.
산행코스가 바뀌면서 정환은 세 번이나 답사를 해보았으니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을 것이나 서울근교 산행도 익숙하지 않은 수남에게는 꽤나 부담되었을 것.
피아골로 가는 내리막길 경사는 장난이 아니었다.
편이한 하산길이려니 생각했었는데 좁기도 하려니와 돌들이 자유롭게 튀어나와 있었으며 가파르기까지 하였으니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자칫 헛디디면 발목이 어긋나기 쉽다고 했던, 운전수의 말은 뻥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환은 시작할 때 발목 돌리기 연습을 시키기까지 했던 것이었구나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오여사는 신발이 말썽을 부렸는데 다행히 비상용 운동화가 준비되어 있어서 큰 어려움은 면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홍식이었다.
그 동안 병원 운영하느라 변변한 등산 한번 하지 안 했던 터라, 우리 나이의 무릎님께서 힘들다고 아픔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걸음을 서두르면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거 같아, 시간을 한정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발걸음에 맞추기로 하였다.
굳이 4시 40분 발 서울행 버스에 우리의 발을 묶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늦으면 밤 버스를 타면 그만이었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따박따박 내려가니 이제는 마음까지 널널해지고, 올라오는 등산객들하고도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눈을 떠서 산 속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산 저편을 바라다보기도 하였더니 나무들이 물들어가고 있음이 보였다.
산등성이에서 보았던 사춘기적 단풍이 아니라 가까이 계곡에는 벌써 신혼 같은 단풍이 찾아들고 있었다.
시원하고 깨끗한 피아골 계곡 물이 가을산 단풍 빛을 고스란히 받아 우리들 마음속까지 전달해 주고 있었다.
이름하여 三紅沼.
지리산 10 景 중 하나인 피아골 단풍의 백미.
산이 먼저 붉어지니 山紅이요,
따라서 계곡의 물도 붉게 물드니 水紅이며,
그것을 보고 그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또한 붉게 물들지 않을 수 없으리니 이를 人紅이라고도 하고 心紅이라고도 한다던가.
단풍이 어찌나 흐드러지게 피어서 마치 선홍색 핏빛처럼 보이더라 해서 ‘피아골’.
또 누구는 이렇게 풀었다. 화전민의 찢어질 듯 가난함이 붉게 핏물이 들었던 곳이어서 피밭골이 되었고,
또는 근세에 빨치산의 원혼들이 피를 토하다가 피밭골이 되었다나 어떻다나.
피밭골에 세월이 흘러가니 피앗골로 발음이 조금 바뀌었고, 피앗골은 다시 피아골이 되었더라. (실제 피밭골의 사전적 의미는 피-벼와 함께 자라는 잡초의 일종-를 심은 밭이 많은 골짜기일 것이고, 이 일대에 화전민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듯한 말들은 심심한 사람들이 만들어 쓰면 되는 것.
난 ‘피’ 가 주는 어감에 섬뜩하기도 하고 화전민의 찢어지는 가난함은 괜히 난감하게 쓸쓸해지니,
오늘은 그냥 그림 같은 자연 속에서 2 紅을 만나고 내가 3 번째 紅이 되었으면 싶었다.
점심하기로 한 피아골 대피소에 도착한 것이 12시 40분 경.
정환이 계산으로는 40 여분이 늦은 것이었지만 나의 계산으로는 1 시간이나 빨리 도착한 것이었다.
등산화가 말썽을 부린 오여사나 무릎이 힘들기만 했던 홍식을 감안하면, 초행길에 대단한 성공이었다.
정환과 수남은 30 여분 빨리 내려와 멋진 불판에 꽃게 해물탕을 끓이고 있었다.
정환은 귀찮게 방해하는 바람을 막아내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수남은 그런 정환을 철저하게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바베큐용 불갈비도 나오고 상추와 쌈장도 나왔다.
아침에 뜸들여 놓은 햇반도 나왔다. 또 포카리스웨트가 빠지면 이야기가 되다가 안 된다.
도대체 포카리스웨트는 몇 병을 가져왔단 말인가.
서울에서 내려온 꿀떡, 사과 그리고 귤까지. 멧돼지 가게에서 가져온 파김치와 특별한 김치까지. 진수성찬이 만들어졌다.
산중진미가 따로 없었다. 서울집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 맛을 알 수 있으리.
해물탕 국물에 찬 햇반을 말아서 먹는 맛은 ‘진미’, 가을산 속의 쌀쌀함을 녹여주고도 남았다.
홍식과 나는 두 그릇인가 세 그릇인가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거기에 모나카와 자유시간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환이는 지난 몇 주일 근무를 제대로 했는지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어설프게 막 타먹는 커피는 이럴땐 ‘막커피’가 아니라 ‘왕커피’였다. 맛도 왕이었지만, 왕처럼 부러울 것이 없었다.
2 시간 여를 더 가면 표고막터. 피아골이 끝나는 곳 또는 시작되는 곳.
물리적으로는 2 시간밖에 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는 4 시간 여일 것.
수남에게도 홍식 부부에게도 우리집 그냥에게도.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하산길이라는 보상적 심리가 발동한 것일까.
골짜기의 나뭇잎들이 훨씬 아름답게 물들어있고 계곡물도 예사롭지 않게 하얗게 노랗게 또 갈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피아골이 벌써 끝나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까지 곁들여지니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다시 한번 ‘三紅沼’라고 하자.
내 큰 눈으로는 표고막터 주변의 단풍이 우리의 청년기처럼 풋풋한 풋내가 나는 듯 하였는데,
또 어느 곳은 신혼 같은 단풍이 되어 살짝 부끄러워 하는 듯하기도 하였는데, 금방 자신만만하게 젊음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덜 농염하여 요염한 여인이 되어 내 혼을 빼낼 만큼까지는 더 시간이 필요한 듯 하였다.
바위 절벽이 자연스레 산길이 되었는데 그 옆으로 흐르는 계곡 물은 가을 산빛과 함께 붉은 단풍을 받았는지 가을 햇볕과 함께 마음껏 어울리고 있었다.
뽕뽕다리 철판 아래에도 가을빛은 심란하게 번지고 가을물 위에 떨어진 갈색 나뭇잎은 가을을, 지리산의 가을을 노래하고 있었다.
무릉도원인가.
고3 고문시간에 배운 遊山歌 한 구절이 생각났다.
‘소부 허유 문답하던 기산 영수가 예 아니던가.’
복사꽃 피는 봄이 아니고 단풍잎 떨어지는 가을인 것이,
중국의 기산과 영수가 아닌 지리산 계곡인 것이, 탈속한 소부와 허유가 아니고 우리들 속세의 친구들끼리인 것이 원전과 다르지만,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져서 뭐하며 부귀와 영화를 또 따져서 뭐 하겠는가.
뭐 무릉도원이 별 것인가.
과장법을 조금 써서, 내 마음이 꿈 속 같으면, 바로 그것이, 바로 그 곳이, 바로 그 때가, 내 마음의 무릉도원일 것이다.
우리집 그냥씨가 나의 속좁음을 지리산 만방에 널리 알려버렸다.
15년 가까이 된 고물 등산화를 바꿔주지 않아서 드디어 왼발 복숭아뼈 근처에 난리가 났다는 것.
나는 꼼짝없이 한국의 스쿠르지가 되어야 했다.
오래된 바이올린이, 오래된 친구가, 오래된 와인이, 오래된 마누라가 좋은 것처럼,
깊은 산행에는 오래된 등산화가 새로산 것 보다 편안할 것이다, 였었는데 생활의 지혜나 경험의 선견이 오늘 무참히 망가져야 했다.
이제와서 물약을 바른다고 쩔뚝거리지 않을 수 있으며, 신발 뒤축을 눌러서 신는다고 하산길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는가.
나는 언제나 좋은 지아비될 소양이 부족한 모양,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이 남은 난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홍식은 광주에 가자 마자 튼튼하고 예쁜 등산화를 아내에게 사줄 것이며, 또 제일 좋은 지팡이 둘을 사서 하나씩 가져 다음 등산에 대비한다니 얼마나 부러운가.
드디어 표고막터.
피아골 하산길이 끝이 났다.
피밭길 같던 성삼재-임걸령-피아골 산행이 끝을 보았다.
잠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우리가 너무 일찍 즐거워하고 있었는지 우리집 배낭속에서 오이녀석이 머리를 내밀고 가을빛을 쪼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오박사 눈에는 그 오이가 여느 오이처럼 보이지 않았던 모양.
배낭 속에서 삐져나온 모습이 흡사 무엇을 갈구하는 듯 느껴졌고,
급기야 부족해서일까 넘쳐서일까 배낭의 주인에게 짓궂게 물었더라.
‘넘쳐서이지요’ 하며 배낭 주인은 내 얼굴을 세워주었다.
갑작스레 배낭밖으로 나온 오이를 보며 모두들 한바탕 시원하게 웃으며 산행의 끝을 기념하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다고 하였더냐.
정환과 홍식의 자동차가 주차되었던 곳은 주차비를 내든지 상당한 음식을 먹든지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산식을 하면 되겠네 뭐. 싱싱한 은어회, 지리산 토종 도토리묵, 동동주, 부추전.
동동주를 한잔씩 손에 들고, 시작을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갑자기 우리집 그냥씨가 ‘진달래’ 한다.
얼씨구 어쩐 일로 진달래를 외칠까 조금 놀라고 있는데 음험한 남녀상열지사인 ‘진달래’ 가 아니고 ‘진실로 달콤한 우리들의 미래를 위하여’ 란다.
그러자 오여사께서 ‘브라자’는 어젯밤에 했으니 오늘은 ‘병나발’을 불자고 한다, ‘병원과 나의 발전을 위하여‘.
그래서 난 ’개나발‘ 은 어떠냐,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나라도 위하고 병원도 위하고 우리 개인들의 달콤한 미래를 위하여 지리산의 남은 정기를 우리들 몸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도토리묵은 지리산 토종답게 입안에 쩍쩍 달라붙었고,
섬진강 은어는 입안에서 은은하게 살살 녹았으며,
부추전은 산행끝 새로운 힘을 부추길만 하였고,
동동주는 입 속을 동동거리며 몸 속까지 동동거려 내려가
어느새 우리들 얼굴을 붉게 만들고 마음까지 붉게 만들어 해질 무렵 가을산 단풍을 닮게 만들고 말았다.
銀漁白酒 紅人面, 夕陽丹楓 紅人心.
마침내 心紅을 얻었다.
오후 4시.
정환은 창원으로, 홍식부부는 우리를 남원까지 태워서 오후 5시 30분발 서울행 버스에 올려놓고 광주로 갔다.
우리를 보내고나서라도 꼭 온천을 하고가라고 강요했어야 했는데 잊어버리고 못했다.
모처럼 온천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때문에 시간이 허락되었는지.........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는 일요 단풍객들이 모두 나온 듯 소걸음도 아닌 게걸음으로 우리의 귀가를 한층 늦게 만들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였다.
뱀사골-피아골 코스를 밟지 않고 성삼재-피아골 코스를 선택한 것은 현명하였다.
부부가 함께 하는 지리산 같은 깊은 산행은 가장 가벼운 코스가 너무나 당연하였다.
자칫 고생할 수도 있었는데 그 추억거리가 아쉽기도 하지만 현명한 판단이었다.
당초 가기로 했던 친구들이 갑작스런 일들 때문에 함께 못하고,
사전준비를 미리 잘 하였더라면 다른 친구들과도 함께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즐거움 속에서도 또 아쉬움으로 남았다.
또 본의 아니게 정환에게 세 번의 답사를 하게 한 중노동,
점심상을 너무 찐하게 차리게 한 중노동,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중노동을 시키게 되었음에 미안하였지만,
이 기회에 산을 가까이 하는 재미를 알았다면 그 미안함이 없어질 것인데, 돌부처의 앞날을 지켜볼 것이다.
走馬看山. 逐鹿者 不見山.
제한된 시간에 내리막길을 달리다보니 허겁지겁 지리산의 깊은 맛, 붉은 물이 들어가는 지리산을 더 가까이 더 많이 보지 못하였다.
쉬엄쉬엄 여기저기 냄새맡아가며 좀더 지리산에 머물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쉬움은 항상 남는 것, 다음 언제, 더 나이 들어 힘 빠지기 전에 지리산 종주를 해보았으면 싶다.
25.5 키로 미터,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또 아무리 바쁜 일상 속이라도 없는 시간을 빼내고 모으고 만들어서 주말이면 가까운 계룡산이나, 속리산도 다니면 참 좋을 것이고 가끔 친구들과 떼지어 다니면 더 좋을 것이다.
지방 친구들과는 중간 어디 무주의 덕유산이나 산이 힘들면 공주의 갑사나 동학사 같은 곳에서 더도말고 덜도말고 1 년에 딱 한번이라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생 처음 해보는 지리산 여행이 즐거움 하나 가득 그리고 아쉬움 반쯤 남기고 끝이 났다.
3개도 5개군,사방 100 Km의 산자락을 가진
우리의 智異山,
어리석은 자를 받아들여 머물게 하고, 거기서 다름을 찾아 새로움을 얻게 하여, 마침내 그를 지혜롭게 만든다는 데,
나는 다른 것을 찾고 새로운 것을 배웠는가, 지혜로워졌는가.
어리석은 나는 한번 지리산을 찾아가서는 더 어리석게 지혜로웠는지를 묻고 있다.
콜벤의 운전수는 거칠고 또 거칠었다.
그는 닳고 닳아서 손님들을 가지고 놀았다.
지리산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수준에 운전수가 맞추어 버릇한 결과인지,
아니면 이곳에 오는 모두가 운전수의 수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인지,
잠시 나는 헷갈렸는데 운전수는 계속 거칠게 말하면서 거칠게 운전하였다.
오늘의 정치수준이 우리들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곳을 찾는 산행객들이 우선 빨리 달려 올라가서 빨리 지리산 구경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리라.
손님들 속마음이 어서 빨리 가서 어서 빨리 산행행사를 마치고싶어서일 건데,
거칠게 빨리 달리는 운전수만을 나무라서 무엇하겠는가.
보통 성삼재까지는 40분 정도 걸리는데 자신은 20분, 때로는 15분에도 갈 수 있다고 자랑하였는데..
내게는 겁주는 것으로 들렸다.
어찌나 미운지 콱 쥐어박고 싶었지만 모두의 안전과 모처럼 산행이 방해를 받을까 봐서 참고 또 참았다.
우리가 빨리 달리기 경주를 하러 온 것이 아닌데,
가을날 아침 이른 시각에 지리산을 휘감으며 천천히 올라가면서 산을 눈아래로 둘러보고 산냄새를 맡아가면서 오르면 이 또한 별미일 것인데, 운전수는 우리의 수준을 천박하게 빨리빨리병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출발한 곳이 표고 700 미터 수준,
꾸불꾸불 산자락을 돌면서 가을아침을 들여다보았어야 했는데,
차가 혹시 넘어지지는 않을까 아찔아찔하게 마음을 졸이며 20분만에 1100 미터 고지의 성삼재에 닿았다.
성삼재는 시골 장바닥보다 더 시끌와글.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들이 모였는가.
남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왔다는 증명사진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은가.
미운 운전수를 불러 한방 박게 만들었다.
잘 박았을까. 차 몰 듯이 거칠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노고단까지는 보통 걸음으로 40 여분.
우리는 마음대로 천천히 걸어서 1 시간 여만에 여유롭게 老姑壇, 해발 1507 미터,를 만났다.
반야봉 1751, 천왕봉 1950 미터와 함께 지리산 3대 주봉 중의 하나.
산신령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
그러나 사방이 허허롭기만 하고 하늘이 펑 열려만 있지 특별한 볼품은 없었다.
8년 전 이 길을 난 구두를 신고 올랐었는데 오늘 그 비포장길은 거의 사라지고 알맞은 돌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노고단의 약수물은 여전히 지리산의 정기를 내주듯 쭐쭐줄 흐르고 우리는 흘린 땀만큼 그 물을 우리의 입안으로, 그 정기를 우리의 몸 속으로 채워 넣었다.
노고단은 지리산 종주가 시작되는 서쪽 끝, 동쪽 끝 천왕봉까지 25.5 키로.
잘 준비된 산꾼들이 3일 걸려 완주한다는데, 언감생심 우리들은 그 맛을 살짝 보다가 임걸령에서 피아골로 하산길을 잡았다.
임걸령까지 가는 첫 2 키로는 좁디좁은 외길의 산길. 종주하는 산꾼들의 발걸음은 바람소리를 내며 우리의 소걸음을 재촉하였다.
고지 산등성이의 가냘픈 나무들을 좀 더 들여다 보고싶은데, 단풍이 들었는지 냄새도 맡고싶은데 바쁘게 내딛는 걸음들에 마음이 쫓기고 말았다.
유난히 키 작은 대나무 잎과 철쭉 같은 앉은뱅이 나무들이 우리들의 발길에 채이고, 활엽수는 물론 침엽수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표고에 따른 식물들의 생태일 것이다.
임걸령가는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이는 지리산은 농염한 여인 같은 단풍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검푸른 바탕 위에 붉은 반점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우리들 인생의 나이테로 치면 이제 막 사춘기.
단풍은 이제 막 자리잡아 가는 듯하였다. 지리산은 10월말이나 11월초쯤 되어야 만산홍엽일 것이라는 말이 맞았다.
하얀 덩어리의 운해가 저멀리 골짜기에 걸쳐 있어 우리가 지금 큰 산에 와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 아래가 화엄사, 오른쪽으로는 무등산, 그러나 시야에 무등산은 들어오지는 않았다.
노고단에서 1 시간 여, 임걸령에 닿아 피아골로 내려가는 길목, 피아골 삼거리.
정환이는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양반걸음으로는 피아골 내리막길을 3 시간 여에 끝내기에는 무리. 그 혼자만 마음과 발걸음이 빨라지는 듯 하였다.
수남은 내색하지는 않으나 정환이의 걸음에 맞추느라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리라.
산행코스가 바뀌면서 정환은 세 번이나 답사를 해보았으니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을 것이나 서울근교 산행도 익숙하지 않은 수남에게는 꽤나 부담되었을 것.
피아골로 가는 내리막길 경사는 장난이 아니었다.
편이한 하산길이려니 생각했었는데 좁기도 하려니와 돌들이 자유롭게 튀어나와 있었으며 가파르기까지 하였으니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자칫 헛디디면 발목이 어긋나기 쉽다고 했던, 운전수의 말은 뻥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환은 시작할 때 발목 돌리기 연습을 시키기까지 했던 것이었구나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오여사는 신발이 말썽을 부렸는데 다행히 비상용 운동화가 준비되어 있어서 큰 어려움은 면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홍식이었다.
그 동안 병원 운영하느라 변변한 등산 한번 하지 안 했던 터라, 우리 나이의 무릎님께서 힘들다고 아픔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걸음을 서두르면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거 같아, 시간을 한정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발걸음에 맞추기로 하였다.
굳이 4시 40분 발 서울행 버스에 우리의 발을 묶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늦으면 밤 버스를 타면 그만이었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따박따박 내려가니 이제는 마음까지 널널해지고, 올라오는 등산객들하고도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눈을 떠서 산 속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산 저편을 바라다보기도 하였더니 나무들이 물들어가고 있음이 보였다.
산등성이에서 보았던 사춘기적 단풍이 아니라 가까이 계곡에는 벌써 신혼 같은 단풍이 찾아들고 있었다.
시원하고 깨끗한 피아골 계곡 물이 가을산 단풍 빛을 고스란히 받아 우리들 마음속까지 전달해 주고 있었다.
이름하여 三紅沼.
지리산 10 景 중 하나인 피아골 단풍의 백미.
산이 먼저 붉어지니 山紅이요,
따라서 계곡의 물도 붉게 물드니 水紅이며,
그것을 보고 그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또한 붉게 물들지 않을 수 없으리니 이를 人紅이라고도 하고 心紅이라고도 한다던가.
단풍이 어찌나 흐드러지게 피어서 마치 선홍색 핏빛처럼 보이더라 해서 ‘피아골’.
또 누구는 이렇게 풀었다. 화전민의 찢어질 듯 가난함이 붉게 핏물이 들었던 곳이어서 피밭골이 되었고,
또는 근세에 빨치산의 원혼들이 피를 토하다가 피밭골이 되었다나 어떻다나.
피밭골에 세월이 흘러가니 피앗골로 발음이 조금 바뀌었고, 피앗골은 다시 피아골이 되었더라. (실제 피밭골의 사전적 의미는 피-벼와 함께 자라는 잡초의 일종-를 심은 밭이 많은 골짜기일 것이고, 이 일대에 화전민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듯한 말들은 심심한 사람들이 만들어 쓰면 되는 것.
난 ‘피’ 가 주는 어감에 섬뜩하기도 하고 화전민의 찢어지는 가난함은 괜히 난감하게 쓸쓸해지니,
오늘은 그냥 그림 같은 자연 속에서 2 紅을 만나고 내가 3 번째 紅이 되었으면 싶었다.
점심하기로 한 피아골 대피소에 도착한 것이 12시 40분 경.
정환이 계산으로는 40 여분이 늦은 것이었지만 나의 계산으로는 1 시간이나 빨리 도착한 것이었다.
등산화가 말썽을 부린 오여사나 무릎이 힘들기만 했던 홍식을 감안하면, 초행길에 대단한 성공이었다.
정환과 수남은 30 여분 빨리 내려와 멋진 불판에 꽃게 해물탕을 끓이고 있었다.
정환은 귀찮게 방해하는 바람을 막아내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수남은 그런 정환을 철저하게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바베큐용 불갈비도 나오고 상추와 쌈장도 나왔다.
아침에 뜸들여 놓은 햇반도 나왔다. 또 포카리스웨트가 빠지면 이야기가 되다가 안 된다.
도대체 포카리스웨트는 몇 병을 가져왔단 말인가.
서울에서 내려온 꿀떡, 사과 그리고 귤까지. 멧돼지 가게에서 가져온 파김치와 특별한 김치까지. 진수성찬이 만들어졌다.
산중진미가 따로 없었다. 서울집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 맛을 알 수 있으리.
해물탕 국물에 찬 햇반을 말아서 먹는 맛은 ‘진미’, 가을산 속의 쌀쌀함을 녹여주고도 남았다.
홍식과 나는 두 그릇인가 세 그릇인가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거기에 모나카와 자유시간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환이는 지난 몇 주일 근무를 제대로 했는지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어설프게 막 타먹는 커피는 이럴땐 ‘막커피’가 아니라 ‘왕커피’였다. 맛도 왕이었지만, 왕처럼 부러울 것이 없었다.
2 시간 여를 더 가면 표고막터. 피아골이 끝나는 곳 또는 시작되는 곳.
물리적으로는 2 시간밖에 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는 4 시간 여일 것.
수남에게도 홍식 부부에게도 우리집 그냥에게도.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하산길이라는 보상적 심리가 발동한 것일까.
골짜기의 나뭇잎들이 훨씬 아름답게 물들어있고 계곡물도 예사롭지 않게 하얗게 노랗게 또 갈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피아골이 벌써 끝나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까지 곁들여지니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다시 한번 ‘三紅沼’라고 하자.
내 큰 눈으로는 표고막터 주변의 단풍이 우리의 청년기처럼 풋풋한 풋내가 나는 듯 하였는데,
또 어느 곳은 신혼 같은 단풍이 되어 살짝 부끄러워 하는 듯하기도 하였는데, 금방 자신만만하게 젊음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덜 농염하여 요염한 여인이 되어 내 혼을 빼낼 만큼까지는 더 시간이 필요한 듯 하였다.
바위 절벽이 자연스레 산길이 되었는데 그 옆으로 흐르는 계곡 물은 가을 산빛과 함께 붉은 단풍을 받았는지 가을 햇볕과 함께 마음껏 어울리고 있었다.
뽕뽕다리 철판 아래에도 가을빛은 심란하게 번지고 가을물 위에 떨어진 갈색 나뭇잎은 가을을, 지리산의 가을을 노래하고 있었다.
무릉도원인가.
고3 고문시간에 배운 遊山歌 한 구절이 생각났다.
‘소부 허유 문답하던 기산 영수가 예 아니던가.’
복사꽃 피는 봄이 아니고 단풍잎 떨어지는 가을인 것이,
중국의 기산과 영수가 아닌 지리산 계곡인 것이, 탈속한 소부와 허유가 아니고 우리들 속세의 친구들끼리인 것이 원전과 다르지만,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져서 뭐하며 부귀와 영화를 또 따져서 뭐 하겠는가.
뭐 무릉도원이 별 것인가.
과장법을 조금 써서, 내 마음이 꿈 속 같으면, 바로 그것이, 바로 그 곳이, 바로 그 때가, 내 마음의 무릉도원일 것이다.
우리집 그냥씨가 나의 속좁음을 지리산 만방에 널리 알려버렸다.
15년 가까이 된 고물 등산화를 바꿔주지 않아서 드디어 왼발 복숭아뼈 근처에 난리가 났다는 것.
나는 꼼짝없이 한국의 스쿠르지가 되어야 했다.
오래된 바이올린이, 오래된 친구가, 오래된 와인이, 오래된 마누라가 좋은 것처럼,
깊은 산행에는 오래된 등산화가 새로산 것 보다 편안할 것이다, 였었는데 생활의 지혜나 경험의 선견이 오늘 무참히 망가져야 했다.
이제와서 물약을 바른다고 쩔뚝거리지 않을 수 있으며, 신발 뒤축을 눌러서 신는다고 하산길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는가.
나는 언제나 좋은 지아비될 소양이 부족한 모양,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이 남은 난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홍식은 광주에 가자 마자 튼튼하고 예쁜 등산화를 아내에게 사줄 것이며, 또 제일 좋은 지팡이 둘을 사서 하나씩 가져 다음 등산에 대비한다니 얼마나 부러운가.
드디어 표고막터.
피아골 하산길이 끝이 났다.
피밭길 같던 성삼재-임걸령-피아골 산행이 끝을 보았다.
잠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우리가 너무 일찍 즐거워하고 있었는지 우리집 배낭속에서 오이녀석이 머리를 내밀고 가을빛을 쪼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오박사 눈에는 그 오이가 여느 오이처럼 보이지 않았던 모양.
배낭 속에서 삐져나온 모습이 흡사 무엇을 갈구하는 듯 느껴졌고,
급기야 부족해서일까 넘쳐서일까 배낭의 주인에게 짓궂게 물었더라.
‘넘쳐서이지요’ 하며 배낭 주인은 내 얼굴을 세워주었다.
갑작스레 배낭밖으로 나온 오이를 보며 모두들 한바탕 시원하게 웃으며 산행의 끝을 기념하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다고 하였더냐.
정환과 홍식의 자동차가 주차되었던 곳은 주차비를 내든지 상당한 음식을 먹든지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산식을 하면 되겠네 뭐. 싱싱한 은어회, 지리산 토종 도토리묵, 동동주, 부추전.
동동주를 한잔씩 손에 들고, 시작을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갑자기 우리집 그냥씨가 ‘진달래’ 한다.
얼씨구 어쩐 일로 진달래를 외칠까 조금 놀라고 있는데 음험한 남녀상열지사인 ‘진달래’ 가 아니고 ‘진실로 달콤한 우리들의 미래를 위하여’ 란다.
그러자 오여사께서 ‘브라자’는 어젯밤에 했으니 오늘은 ‘병나발’을 불자고 한다, ‘병원과 나의 발전을 위하여‘.
그래서 난 ’개나발‘ 은 어떠냐,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나라도 위하고 병원도 위하고 우리 개인들의 달콤한 미래를 위하여 지리산의 남은 정기를 우리들 몸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도토리묵은 지리산 토종답게 입안에 쩍쩍 달라붙었고,
섬진강 은어는 입안에서 은은하게 살살 녹았으며,
부추전은 산행끝 새로운 힘을 부추길만 하였고,
동동주는 입 속을 동동거리며 몸 속까지 동동거려 내려가
어느새 우리들 얼굴을 붉게 만들고 마음까지 붉게 만들어 해질 무렵 가을산 단풍을 닮게 만들고 말았다.
銀漁白酒 紅人面, 夕陽丹楓 紅人心.
마침내 心紅을 얻었다.
오후 4시.
정환은 창원으로, 홍식부부는 우리를 남원까지 태워서 오후 5시 30분발 서울행 버스에 올려놓고 광주로 갔다.
우리를 보내고나서라도 꼭 온천을 하고가라고 강요했어야 했는데 잊어버리고 못했다.
모처럼 온천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때문에 시간이 허락되었는지.........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는 일요 단풍객들이 모두 나온 듯 소걸음도 아닌 게걸음으로 우리의 귀가를 한층 늦게 만들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였다.
뱀사골-피아골 코스를 밟지 않고 성삼재-피아골 코스를 선택한 것은 현명하였다.
부부가 함께 하는 지리산 같은 깊은 산행은 가장 가벼운 코스가 너무나 당연하였다.
자칫 고생할 수도 있었는데 그 추억거리가 아쉽기도 하지만 현명한 판단이었다.
당초 가기로 했던 친구들이 갑작스런 일들 때문에 함께 못하고,
사전준비를 미리 잘 하였더라면 다른 친구들과도 함께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즐거움 속에서도 또 아쉬움으로 남았다.
또 본의 아니게 정환에게 세 번의 답사를 하게 한 중노동,
점심상을 너무 찐하게 차리게 한 중노동,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중노동을 시키게 되었음에 미안하였지만,
이 기회에 산을 가까이 하는 재미를 알았다면 그 미안함이 없어질 것인데, 돌부처의 앞날을 지켜볼 것이다.
走馬看山. 逐鹿者 不見山.
제한된 시간에 내리막길을 달리다보니 허겁지겁 지리산의 깊은 맛, 붉은 물이 들어가는 지리산을 더 가까이 더 많이 보지 못하였다.
쉬엄쉬엄 여기저기 냄새맡아가며 좀더 지리산에 머물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쉬움은 항상 남는 것, 다음 언제, 더 나이 들어 힘 빠지기 전에 지리산 종주를 해보았으면 싶다.
25.5 키로 미터,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또 아무리 바쁜 일상 속이라도 없는 시간을 빼내고 모으고 만들어서 주말이면 가까운 계룡산이나, 속리산도 다니면 참 좋을 것이고 가끔 친구들과 떼지어 다니면 더 좋을 것이다.
지방 친구들과는 중간 어디 무주의 덕유산이나 산이 힘들면 공주의 갑사나 동학사 같은 곳에서 더도말고 덜도말고 1 년에 딱 한번이라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생 처음 해보는 지리산 여행이 즐거움 하나 가득 그리고 아쉬움 반쯤 남기고 끝이 났다.
3개도 5개군,사방 100 Km의 산자락을 가진
우리의 智異山,
어리석은 자를 받아들여 머물게 하고, 거기서 다름을 찾아 새로움을 얻게 하여, 마침내 그를 지혜롭게 만든다는 데,
나는 다른 것을 찾고 새로운 것을 배웠는가, 지혜로워졌는가.
어리석은 나는 한번 지리산을 찾아가서는 더 어리석게 지혜로웠는지를 묻고 있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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