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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을 산에서 살았으면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0. 22:28

2003.10.12 월. 백운대를 다녀와서

萬物一體 
天地同根
慈悲無敵
放生道場

1 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드디어 도선사 입구에 내린, 산행객을 도선사는 이렇게 맞이하였다. 
일요일 늦은 아침, 백운대의 가을을 만나러 가는 길은 소풍가는 기분이었다.

도선사 입구는 벌써 가을산에 취했는지 사람들의 표정은 희희락락.
여기저기 사람들의 무더기는 시름이 보이지 않았다.
김밥 파는 아줌마도 신이 나고, 족발 파는 아줌마도 즐거울 뿐이었다.

나는 공갈 호떡에 침이 돌아 천원으로 두 개를 사, 하나는 내 입에 다른 하나는 마누라 입에 넣었다.
점괘도 보고 싶은데 차마 체면에 쪼그리고 앉아 내 죽을 날이 얼마 남았는지, 내 아들들 앞날이 어떨지, 우리나라 좋은 나라 될지, 복채를 내놓지는 못하였다.
대신, 맛배기 배를 먹어보라는 수더분한 아줌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이천원을 덥석 주고 아이들 머리만한 배 세 덩어리를 사서는, '배낭을 무겁게 한다, 마누라 말은 안듣고 남의 말특히 젊은 아줌마 말은 왜 그리 쉽게 듣느냐'는 핀잔을 순진한 줄만 알았던 마누라에게 또 들었다. 그래도 나주배라고 하잖어? 제평이, 영애, 유선이 고향이 나주 아닌가 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을 산과 배, 그리고 나. 어울리지 않을까.

왠 뽕작이 도선사 가는 아스팔트 위를 흐르고 있었다. 
난 도선사 가는 아스팔트가 죽도록 밉다. 왜 중생의 고달픔을, 세속의 번잡함을 구하는 도선사가 아스팔트 길을 깔아 중생의 마음을 안타깝게 힘들게 만드는지,
차라리 자비무적 방생도량이란 石物을 치워버리든지,
난 버스에 내려서 도선사까지 이어지는 50여 분의 아스팔트 길이 밉고 또 밉다.
그 위를 흐르는 뽕짝도 싫다.
그런데  '저 푸른 초원 위에 초가집을 지어놓고...............한 백년 살고싶네' 구성지게 퍼지는 뽕짝이 그다지 싫지 않게 들렸다.
멀리 가까이서 독경소리가 가을의 백운대로 날 은근하게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서울의 산행객들이 오늘 모두 백운대에 모였는가. 줄을 서서 오르고 내리고 하다니, 덕분에 가픈 숨을 고르기도 쉽고, 발아래 단풍이 얼마나 물들었는지 눈셈도 하여 좋기도 하였다.
그래도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 백운대 정상길은 심해도 한참 심했다. 가을 산이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서울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인수봉 바위에 붙어서 암벽등반을 하는 마니어들, 난 부럽고 또 부러웠다. 나도 한 번 해봤으면.............. 해보지 못하니 비틀어나 볼까, 꼭 큰 대머리에 수많은 개미들이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운대 836.5 미터. 
상추 쌈장 구운돼지 마늘 고추 그리고 배 사과 커피, 국물이 흘러 냄새나는 김치. 집사람과 엉거주춤하며 바위 위에서 먹는 도시락은 꿀맛. 디카를 가져와서 한방을 남겼어야 하는데, 항상 결정적 순간에 빼먹고 다니니 어쩔 수 없는 건망.

衛門에서 龍岩門으로, 도선사 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외길을 가듯, 오르는 사람 내리는 사람이 겹쳐져서 한동안 발길은 꼼짝없이 서서 기다려야 했다. 공사하는 도로를 지날 때 자동차들이 한 쪽은 가고 다른 쪽은 기다리듯이.
또 덕분에 힘든 내리막 길에서 숨을 고르고, 발아래 눈 아래 '滿山紅葉'을 즐길 수 있어서 한편으론 좋았다.
멀리 내려다보는 산자락의 나뭇잎은 아직 청춘의 한 때, 파랗기만 한데, 가까이 눈 아래는 노랗고 빨갛고 또 파란 것들도 있어, 마음까지 물들여 닥치고 있었다. 노랗게 빨갛게 파랗게, 또 모두 함께 넣은 빛깔로 마음을 물들이는 듯 하였다.

가을비까지 들이닥쳐 왔다.
후다닥 지나가지는 않고 알맞게 내리고 있었다. 마른 잎을 조금 촉촉하게 할 요량이었는지, 나뭇잎을 더 은근하게 물들여야겠다 싶었는지,
도선사 가까이 오니 빗줄기는 더 굵어지려 하였다.
햇살은 어느덧 사라지고 전형적인 가을날 해질 무렵이 연출되고 있었다. 거기에 가을비를 더 해보면 그림은 더 그럴 듯 해졌다.
오른쪽 무릎이 자꾸 신경을 건드리는 것만 빼고는 가을날, 일요일, 해질 무렵, 가을비, 단풍
모두를 넣어 그림을 그린다면 끝내주는 수채화 한 폭.

도선사를 빠져나오니 다시 그 석물에 닿았다.
'三日修心 千載寶/百年貪物 一朝塵' 
그러고보니 산을 올라갈 때는 앞을 보면서 '만물일체 천지동근' '방생도량 자비무적'을 배우게 하고, 산을 내려올 때는 그 뒤를 보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정성스런 마음을 가꾸고 가져야 보물은 오래도록 내 곁에 있는 것이지,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보물도 하루아침에 먼지에 지나지 않으리' 라고 쓰여 있는데,

도선사의 아스팔트 길과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글귀가 떡 하고 버티고 서있는 것 아닌가. 도선사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아스팔트 길과 만나야 하고, 하산길 자동차들은 왜 그리 많은지 왜 그리 거친지, 걸어가는 하산객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얼마나 즐거운 인생인가 얼마나 살만한 우리네 세상인가, 가을산을 만나 한껏 즐겁고 신났던 마음이, 투덜거리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그 마음이 또 무너졌다. 난 또 변덕을 부리고 말았다.

도선사의 아스팔트 길 정말 미웠다. 정말 싫었다.
자주 가는 순대국집. 술국에 막걸리 한 통. 가을비를 부어서 마시니 금방 얼굴에 물이 들었다. 마음에도 물이 들었다. 내가 비주류임을 빗대어 잘 쓰는 '백주 홍인면이요 황금 흑인심이라' 인데, 어제는 단풍백주 홍인면이요 석양추우 홍인심이었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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