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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밤 비행기 속에서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0. 22:02

동남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비행기의 출발시각은 보통 한밤 중.방콕이 그렇고 자카르타, 호치민이 그렇다. 옛날에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게 짜여졌었는데, 요즘은 한밤에 출발시켜 아침에 떨어지게 하여 오전 일과를 볼 수 있게 맞추어져 있다.

비행기 안에서 밤을 보낼 수 있으니, 낮 시간을 토막내지 않으면서 활용할 수 있고, 덤으로 숙박료도 절약되어서,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말없이 좋아한다.

최근에는 주 5일제 근무와도 연결되어 금요일 오후 늦게 서울 출발, 월요일 아침 서울 도착하는 2박 4일 최절약형 관광상품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다. 호치민의 경우는 현지시각으로 밤 1시경, 우리시각으로는 새벽 3시경, 이륙하여 5시간 여를 날아 서울에 아침 8시경 도착한다.

난 남달리 좀 잠자리에 예민하고 까다로운 편이어서, 2 시간의 시차임에도 출장 후 바로 평상적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고 자주 씩씩대곤 하는데, 요즘 밤 비행기를 타면 요령이 생겨 쉽게 일상으로 돌아올 때도 있다.

타자마자 가벼운 술을 하고 잠을 자면 자연스럽게 아침 서울 시각에 맞게 일어나는 것인데, 가끔 맞아떨어질 때도 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한다. 대신, 그 동안 밀린 신문을 모두 읽거나 그래도 부족하면 가벼운 잡지를 읽거나 하면서 끝까지 잠을 자지 않으며 서울까지 오는 것인데, 제법 승률이 높다.

출장 중 메모했던 일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메모하지 못한 것들은 다시 모으기도 하면, 어느 사이 비행기의 창 밖이 까만 어두움에서 하얗게 바뀌는 새벽과 만나게 된다.

낮 보다 밤 비행기가 더 좋은 것이 밤을 도와 서울로 오다보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시간이 널널하고 엉성하게 느껴져 마음이 그냥 편하여 난 밤 비행기가 너무 좋기만 하다. 나 혼자만의 공간, 나 혼자만의 시간이 확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를 잤을까. 신문 셋을 모두 읽고서 잠을 청했으니 많이 잤어야 1시간 반. 심한 흔들림, 이제껏 이렇게 흔들리기는 처음. 몸이 공중으로 한 번 튕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행기가 세게 흔들렸고 그 바람에 잠이 깨었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2시간 여를 더 날아야 한다. 의외로 몸은 가볍다. 피곤하지도 않고 잠을 설친 후의 찜찜함도 찌부드드함도 없다.

비행기 창 밖은 온통 시커멓게 칠흑이다. 땅을 내려다봐도 온통 까맣게 어둡고 거대한 산이 되어있다. 불빛이 띄엄띄엄 건너뛰더니 어느 곳에선 아예 선명한 직선을 그리고는 불길이 되어 뻗어있다. 중국 어디일까 한반도 어느 도시 위를 지나는 것일까. 큰 도로의 가로등일까. 어느 곳은 큰 산 속에 불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불길이 번지는 듯 보인다.

하늘을 쳐다보니 별들이 총총, 뚜렷한 것은 제법 크다. 또 좁쌀 같은 별들도 무수히 많다. 셀 수가 없다. 눈이 시릴 정도로 촘촘히 박혀 있다. 누가 말했다. 하늘의 별은 문명의 발달 정도와 반비례한다. 도시 문명이 발달할수록 도시의 불빛이 강하여 하늘의 별빛을 가려버린다는 것이다. 밤 하늘의 별빛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인생이 정말 행복한 것인가. 어둠을 밝혀주는 도시의 인공불빛만으로 인생은 정말 편리하고 행복하다 할 것인가.

한참을 별을 보았더니 작은 별들, 점박이 별들이 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상상 속인지 착각 속인지 셀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점박이 별들이 촘촘히 하늘에 박혀있다. 상상일 것이다. 착각일 것이다. 착시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에 가까워지면서 하늘이 하얗게 더 밝아오고, 시커먼 땅, 큰 산 같던 땅은 그 머리 위에 희미하나 기다란 구름모자를 얹고 있다. 산 위에 떠있는데, 공중에 떠 있는데, 산 위에 떠있는지, 땅 위에 붙어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여승무원이 얼큰한 라면을 끓여다준다. 이 맛을 누가 알 것이랴.
한식을 가까이 못한 5일 후, 이른 아침에 그것도 비행기 속에서, 라면의 얼큰함과 만난다, 그리고 거기에 모닝 커피까지 만난다, 아이들 말로 '죽인다'.

얼큰하고 짭짜름한 새벽의 라면은 뱃속을 후벼서 뒤집어버리는지, 이어지는 커피는 깔깔한 입 속을 씻어내고 탑탑한 목 속을 뚫어내는지, 나의 몸과 마음은 벌써 여독이 다 풀리고 만다.거기에 커피의 향은, 코끝을 벌름거리게 하는 커피의 냄새는 차라리 덤이다.

창 밖은 어느 사이, 20여 분이 지나는 사이에 활짝 열렸다. 시커멓고 커다란 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신 거대한 바다가 되어 나타났다. 검은 듯 연푸른 바다, 그 위에 솜털 구름들이 수없이 물결이 되어 비행기와 함께 떠있다. 저 멀리 붉으레한 구름띠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수평선처럼 되어 또 다른 하늘과 만난다. 태양이 이미 하늘과 땅을 지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솜털 같은 구름들이 또 어느 사이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푸른 하늘이 내 머리 위에 있고, 총총하게 빛을 내던 별들은 인사도 없이 하늘나라로 갔는지 하나도 없다. 이제 땅도 보이지 않고, 불길처럼, 산불처럼 직선을 그리며 타는 것 같던 도시의 불빛도 흔적이 없고 대신 망망대해 같은 드넓은 하늘이 다시 눈 아래 떠있다.

내 머리 위에도, 내 발아래도, 내 옆 창밖에도 온통 푸르고 하얀 바다, 아니 하늘만 있다. 나는 바다 속에 있는 것인가 하늘 속에 있는 것인가. 잠에서 깬지 1 시간 여, 그 1 시간 동안 하늘은 이렇게 신나게 변신하였음이다.

여승무원이 살갑게 또 친절하다. 손님에 대한 특별한 정성이려니, 다른 무엇이 있을까.커피를 또 갖다준다. 창 밖을 자꾸 내다보고, 하늘을 쳐다보고, 잠도 자지 않고 뭔가를 계속 끄적대는, 희끗한 머리의 내가 이상한가, 괴팍하게 보일 것이다. 실내등을 나 혼자만 켜고 있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다.

기내방송은 인천까지 50여 분 남았다고 알린다. 창 밖은 완연히 밝아 아침이 시작되었고, 바다와 땅과 산이, 강물이, 이제는 건물도 모양을 갖추어 아침 인사를 한다. 5일간의 출장이 끝나면서 새로운 날이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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