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하늘이 열린 날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0. 21:34
2003.10.3.금. 하늘이 열린 날

하늘은 활짝 열려 가을손님을 받아들인다.
나는 좁은 가슴을 활짝 열어 가을냄새를 들이마신다.

휴일인 오늘 나는 사무실에 나왔다.
해외 거래선이 중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휴일은 내게 큰 의미가 없다.
상황이 떨어지면 밤낮 시차 상관없이 매달려야 해서, 우리의 공휴일은 별것 아님에 다름없다.
반대로 상황이 없으면, 시간을 죽여 없애느라고 하루종일 몸살을 하곤 했지만 요즈음 갑자기 직원이 나간 뒤로는 그나마 한시도 영일이 없다. 불쌍해졌다.

오늘 사무실에 나오면서 맡아지는 가을은 상쾌하다.
빌딩 끝에 내려와 앉아있는 깨끗한 하늘, 도시의 번잡함과 더러움을 단번에 씻는다.
내 마음은 잠시 갈등한다. 청계산으로 들어가 가을아가씨와 놀아버려? 아니면 백운대에 올라 가을하늘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려봐?

난 또 쉽게 현실 속으로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나의 사무실 왕국으로 가서 순한 막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영국이든 베트남이든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그리고 우리 기러기 방에서 딩굴면 오늘 하루, 하늘이 열린 날, 잘 기념하는 것 아닐까.

오늘따라 나의 막커피는 가을이 들어갔는지 드높은 냄새와 함께 가을아침을 활짝 열어 젖혔다.
사무실은 이제 나의 왕국이 되었고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내일은 백운대를 가든 청계산을 가든 관악산을 가든, 가을 산의 속치마를 들쳐봐야지.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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