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닝반대 백지답안 그리고 8띠= 8D, 학사경고
//컨닝반대 백지답안 그리고 8띠= 8D
1972년.
내가 3학년이 되고나서 학원가는 점점 반정부 분위기가 고조되고 데모가 거의 일상화되었다.
농대내 이념써클인 농대기러기회, 한얼, 농사단 그리고 개척농사단등의 학내활동도 조용히 분주해졌다.
기러기회와 식품공학과를 대표하고 있던 나는 몸가짐에 보다 신중해져야했다.
이념써클활동은 보다 더 활발해졌으나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학업에는 충실하지못하였다. 수업에 빠지는 빈도가 많아졌다. 특히 식품공학 전공과목이 그다지 나의 흥미를 끌지못하였던 것도 큰이유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식품공학 전문분야를 공부해야 하는데 각종 실험실습은 나의 흥미를 전혀 이끌어내지못하엿다.
당연한 결과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자세가 엉망이었다. 시험지를 받아보고는 답안을 작성할 수가 없었다. 수업에 충실히 참여하지못하고 거의 결강하였으니 답안작성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
그때 컨닝하는 것을 모두들 큰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들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배우는 학생들이, 더구나 '서울대생'들이 컨닝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학생들처럼 컨닝을 해서 답안을 작성할 수는 있었지만, 나의 양심상 또 식품공학과 과회장인데, 기러기회 회장인데, 도저히 컨닝으로 답안지를 작성 할 수는 없었다.
나의 원칙주의는 여기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공부도 하지않았는데, 책을 보고 또는 옆친구의 답안을 보고, 내 답안을 작성한다는 것은 잘못되고또 잘못된 일. 공부한만큼 성적을 받아야지 공부하지도 않고 학점을 받으려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나의 이 원칙주의는 졸업후 사회생활 곳곳에서 변함없이 유지되어서 한편으로는 힘들고 한편으로는 떳떳하여 남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래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백지’ 백지 답안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시험이 시작되지마자 나는 이름만 쓰고 백지를 제출하고 퇴장을 하였다.
과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너무 결벽증이 있다고 하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오픈북을 해서라도 답안을 채워내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마저 따를 수가 없었다.
결과는 전공과목 거의 전과목에 걸쳐 ' D'.
8D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전과목 낙제'F'를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식품공학과 교수님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
전공공부는 소홀히 하지만 농업문제.사회문제.정치문제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념써클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식품공학과 과회장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일응 존중해주고 또 어느 정도 평가해주었다는 것.
농담으로 나의 8D 학점을 화투에 빗대어 자찬하면서 또 동시에 자책하였다.
8띠를 했으니 내가 판을 이겼다는 것.
그때 유행하던 삼봉이나 육백에서, 5끗 자리 10개중 7개를 먹으면 그 판은 이기는 것인데 8개를 먹었으니 당연히 내가 판을 휩쓸었다는 것.
그러나 교무처는 나에게 학사경고장을 보내왔다. 학점 2.0 이하 학생에게 주는 경고장이었다.
식품공학과 최우수 수석입학생이 최악성적을 내고 학사경고를 받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딱한 노릇이었다.
식품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나의 잘못이 가장 컸다.
식품공학 수업에 흥미를 잃고, 전공필수과목이 아닌 전공선택과목은 모두 '농업경제학과'의 과목을 전공선택으로 수강신청하고, 흥사단대학생아카데기 소속 '농대기러기회'의 회장을 하면서 학내 이념써클활동에 집중하였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학사경고장을 받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식품공학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그렇다고 마땅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가 서있는 것도 아니었다.
잠정적 결론으로 나는 1년 휴학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한번 마음 결정을 하면 그대로 실행으로 옮기는 ‘돌쇠’
1년 먼저 사회에 나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1년 늦게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다고 나쁜 것은 아닐 것.
1년 동안 쉬면서 생각하다보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그림이 나올 것으로 일단 판단했다.
일단 쉬면서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고시공부를 해보기로 하였다.
우리사회의 불평등, 농업사회의 소외.좌절등 사회문제를 풀려면 아무래도 고급공무원이 되면 해결방안을 내는데 수월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공부하는 것만은 그 누구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휴학을 하고 나는 보성집으로 내려갔다.
공부하기는 보성집보다 쾌상리 보성남교 분교에서 근무하는 작은형집으로 갔다.
신혼이었는데 염치불구하고 고시공부를 시작하였다.
(고시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여, 나는 혼자 공부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수원으로 다시 왔다. 고시학원을 다니려고 하였지만 또 경제적 문제가 대두되었다. 고시공부를 하려면 과외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는데, 과외를 하지않으면 하숙비는 어떻게 조달할 것이며 학원비와 책값은 또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러는 사이 어느덧 1년 휴학도 끝나가고 곧 3학년2학기 복학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왔다. 바로 군대입영영장이 나왓다. 학적변동자로 관리되던 나에게 일차적으로 우선적으로 입영영장이 발부된 것.
나는 복학과 동시 곧 군대에 가게되었다.1973년 10월..논산훈련소 입소)
만일, 그때 내가 1년 휴학을 하지않았다면 어덯게 되었을까? 학내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내가 갈수록 격렬해지는 데모에 무관할 수 있었을까?
1년 휴학을 하고나서 복학을 하니 바로 입영영장이 나왔는데, 만일 휴학을 하지않았다면 졸업하고 군대를 갔을까?
1년 휴학하므로써 1년 더 늦게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1년 빨리 사회에 진출했다면 나는 어느 직종을 택했을까? 1년 늦게 졸업하게 되어 마침 종합상사 열기에 편승할 수 있었는데, 제때 졸업하였다면 식품회사에 취직하였을 것이고 또 어떻게 식품회사에서 나의 새로운 위치를 만들어갔을까? 연구.개발 부분은 전공과목을 소홀이 하였으므로 종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필연적으로 영업부문이나 기획부문으로 배치받기를 희망했을 터인데, 식품전공공부를 소홀이 한 나는 과연 식품회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1년 휴학한 것이 나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운명이란 무엇인가? 나의 길은 이미 정해져있는 것인가?
또 자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