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서울대 식품공학과 과회장 당선, 1972년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9. 7. 16:58

//서울대 식품공학과 과회장 당선, 1972년

비공식 학회활동으로 각 과는 학년별 과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는 공식.비공식 학내활동에서 과대표행위를 하게된다.

1학년때 식품공학과 대표는 서울고 출신의 이00가 스스로 과대표를 하고싶다고하여 그에게 1년 과대표를 맡겼다.

2학년때도 경복고출신 강00가 과대표를 하고싶다고 해서 그가 2학년 과대표를 하였다.

3학년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3학년 과대표가 되면 전체 식품공학과 회장이 자동으로 되는데, 과대표를 하겠다고 나선 자가 셋이 되었다.

과회장을 하겠다고 나선 자가 하나가 아니고 셋이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투표를 통해서 1972년도 식품공학과 회장선거를 하게 되었다.

2학년때 과대표 강00, 서울고출신 김00 그리고 내가 출마하였다.

무슨 정견발표를 했는지 기억이 없지만, 셋은 열심히 과회장되면 어떻게 잘 하겠다는 연설을 했을 것이고, 결과는 내가 최다득표를 해서 과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왜 그리 ‘장’자리를 하고싶어했는지, 1972년에는 흥사단 아카데미 서울대농대 기러기의 회장(보통 이념써클회장도 3학년생이 맡게 된다)이 되었고, 또 식품공학과 과회장까지 하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온다. 그것도 권력욕인가 명예욕인가 아니면 자기과시욕구가 남보다 더 투철했는가?

(2학년 과대표를 했던 강00가 다른 이념써클이던 한얼의 회장이 되었는데 묘하게 그와는 경쟁구도가 만들어졌는지, 그가 하는 일마다 마땅치 않았다. 그다 다시 3학년 과회장까지 하겠다고 나서니 나로서는 탐탁해보이지 않았다. 그와는 먼훗날, 동양그룹에서 그는 동양제과의 이사였고 나는 동양그룹의 신설종합상사인 동양글로벌의 이사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식품공학과의 과회장이 되어서 특별히 한일은 많지 않았다.

73학번의 신입생 환영행사를 하고 그해 상록제 때(보통 권농일 6월10일 전후) 식품공학과 페스티발 행사를 한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당시 수원의 딸기축제는 서울에서 유명하였고 여학교에서 대인기였다. 딸기도 먹고 미팅도 하고 또 신갈에서 보트도 타고 일석삼조.

(식품공학과 페스티발때의 에피소드 하나; 2학년과대표 서울고출신 김00의 여자친구가 이화여대 다녓는데 그녀를 통하여 식품공학과 전체 80여명의 파트너를 서울에서 모시고 오는 것이 쉽지않았다. 버스도착이 지연된 것은 지연된 것 그보다 80여명이 와야하는데 턱없이 부족한 60여명? 거기에 기숙사 식사시간과 제대로 맞추지못하고, 전체 오락행사도 어찌 진행되엇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고...어떻게 수습하였는지 통 기억이 없다. 2학년과대표 김00는 주선한 죄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금 그를 만나면 그때를 생각하고 그때의 수고를 이야기하면 그는 웃으면서 죄송하엿다고 말하는데, 오히려 미안한 것은 과회장인 나였다고 다시 말해준다. 고마웠다고 강조해서 말해준다.)

아니, 아주 특별한 행사가 또 하나 있었다. 식품공학과와 농화학과와의 정기전, 소위 연.고전 같은 정기전,을 기획하여 첫회행사를 한 것.

사실, 서울대 식품공학과의 뿌리는 ‘농화학과’에서 비롯된 것. 그런데 1968년부터 식품공학과 신입생을 독립적으로 선발하고부터 농화학과와는 사사건건 미묘한 신경전을 하게되엇다.

형제와도 같은 매우 친숙한 관계여야 할 것인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양과의 교수님들은 이를 어찌 관리해야할지 전전긍긍하였다.

이제까지는 농화학과가 사회적 진출이 제일 잘되기도 하여 농대내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해왔는데 식품공학과가 창설되면서 그 주도권이 식품공학과로 움직이는 것같아서 였을까?

식품공학과생들은 그들대로 신입생들의 입학성적이 절대적으로 우수하니까 은근히 콧대가 높아져 농화학과가 형님노릇하는 것이 내심 불편해하였다.

교수님들은 양과의 모든 행사를 공동으로 치루라고 조언하였지만 식품공학과의 과대표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식품공학과 독립적으로 과행사를 하였다.

 

과회장이 된 나로서는, 이를 고쳐잡아 양과의 화합을 이루고, 양과의 더나은 발전을 위하여 친목행사를 많이 가졋으면 소망하였다.

이를 위하여 첫회 행사를 식품공학과가 주최하고 행사이름은 ‘식.화전’이라 일컬어 1회생사를 한 기억이 있다. 2회 행사 ‘화.식전’이 이루어졌는지 첫회에서 그치고 말았는지 나는 알지못한다. 내가 3학년 2학기때 휴학을 하면서 더 이상 과회장을 하지않앗으며 그 이후 또 군입대를 하고말았으니 어찌 되었을까? 내가 과회장을 그만두자, 나와 라이벌구도를 가졌던 2학년때 과대표였던 강00가 과회장이 되었다한다.

그는 대표적인 대 농화학과 배척주의자였는데 농화학과와의 정기전이 계속되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