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 학보사 기자와 야학교사
//상록 학보사 기자와 야학교사
서울대에 교양과정부가 설치운영되자 각 단과대학은 신입생을 바로 그해에 맞이하지 못하였다. 농대도 마찬가지였고, 농대 학보사인 ‘상록’도 그러하였다.
교양과정을 마친 농대2년생이 수원농대캠퍼스에 오자, 농대학보사는 기자를 모집하였다.
나는 서울대 방송국 활동을 아르바이트 때문에 도중하차한 쓰라림이 있어서 다시 농대학보사 기자직에 도전하였다.
1차 상식과 논술에 합격하고 최종면접시간이었다.
면접관; 감명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나; 대원군과 조선총독부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면접관;@@@@
나;@@@@
나도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다. 면접관의 질문에 별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답변한 것이 모두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최소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나 또는 헤르만햇세의 ‘데미안’정도가 무난한 수준의 정답 아니었을까?
왜 그때, 고1 입주가정교사할때, 남는 시간에 공대학장님 서가에서 한권한권 몰래 빼다 읽었던, 유주현의 ‘대원군’과 ‘조선총독부’가 나의 입에서 튀어나왔을까? 어떤 돌출행동으로 무엇을 나타내려했을까? 그때도 가끔 나의 삐딱선은 시간장소를 가리지않고 난무하던 중이었는데, 엄숙해야할 학보사 기자시험 최종면접에서 나와서는 아니될 것.
나의 반장난끼는 여지없이 혹독한 결과를 내보였다.
그 다음날, 기자 합격자명단에 나의 이름은 없었다.
낙방한 것이 꼭 나의 돌출답변때문이었을까마는 서울대방송국기자 도중하차에 이어 또다시 학보사 기자시험에 불합격되어 ‘특별과외’활동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쁜 여학생들도 많았으며 그들끼리 캠퍼스커플이 된 경우도 많았다.
(후일 졸업후 농대 학보사 기자출신 선배들이 사회 각분야에 진출하여 몇몇 선배들은 그 필명을 떨쳤던 것을 보면, 나의 불합격은 또다른 운명이었을까?
합격이 되었다해도, 하숙비를 벌어야하는 과외와 농대기러기회 활동을 절대적으로 했던 나에게 학보사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을까마는....)
-야학교사를 하고싶었는데 그놈의 과외때문에 시간을 낼수가 없었다. 주5회 과외+주1회 기러기회활동은 나에게 야학.농악반등 다른 활동을 용납하지않았다.
나에게 누가 하숙비를 무상으로 준다면? 나에게 누가 장학금을 주지않는가? 입학시험때, 수석입학을 했어야 했었다. 식품공학과 수석가지고는 장학금을 탈 수가 없었다. 야속한 일.
농대 수석입학을 했다면 나의 운명은 또 한번 달라졋을까?
하고싶은 야학교사도 하고, 퉁퉁뛰면서 꾕과리를 두드리고 징을 울리면서 가슴속깊은 곳 울분을 토해낼 수 잇었으련만....
수원에서도 학생과외를 해야 하숙비를 벌고 용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나는, 하고싶은 많은 것들을 생략해야만 했다.
어찌되었든,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1년 2년때, 나는 왜 그리 하고싶은 것이 많았는지 무엇이든 하고싶은 것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도전하고 그 결과를 또 받아들인 시간이었다.
우리 아들들은 그리 하였을까? 하고싶은 것 모두 도전하고 또 도전하였을까? 우리아들들은 너무 순하게 너무 안일하게 대학시절을 보내지않았는지 조금 아쉽다. 이것도 그들의 운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