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쓰기 그리고 입주가정교사 1.
일기쓰기 그리고 입주가정교사 1.
일고1년때.
언제쯤이었을까>? 여름방학 끝나고 9월쯤? 아니면 10월?
담임선생님(김정기 영어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무슨 일일까? 일기를 길게 쓰지않는다고 꾸중하시려는가?
(나는 우리담임선생님이 무서웠지만 매우 좋아했다. 영어문장을 그냥 외우도록 요구하셨다. 유엔헌장을 무조건 외우게 하고 잘못외우면 대뿌리로 손바닥을 맞아야했다.
그리고 지금 매우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어린제자들에게 매일 일기를 쓰도록 강제한 것이었다. 향후 서울대입학시험문제를 예상하고 국어작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미리 간파하시고 제자들에게 그 준비를 하게 만든 것. 일기를 매일 쓰라는데 어떻게 써야하는지, 무엇을 써야하는지 도무지 쓸게 없엇고 생각이 나지않았다. 그러다보니 나의 일기장에는 언제나 오늘 몇시에 일어났고 오늘 날씨는 어떠하였고..오늘 참 좋았다등 매일매일 일기장의 내용이 거의 비슷, 더 이상 발전없이 맴돌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일기장을 받아보니, 빨간 손글씨로담임선생님의 멘트가 달려있었다. ‘동희야, 그렇게도 쓸 게 없느냐?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조금만 더 길게 써보렴?’
어찌되었든 그 뒤로 나는 일기쓰는게 재미있어졌고 더 많이 더 길게 쓰는데 점점 익숙해졌고, 오늘날 그런대로 글쓰는데 부담없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쓰고싶은대로 쓸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비록 좋은대학진학을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글쓰는 데 두려움없게 해주신 우리선생님께 감사말씀을 드린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그래서 별명이 ‘촘베’, 키가 작달막하시고, 그러나 안경테 넘어로는 눈매가 날카로우신, 목소리가 저음에 묵직하신, 우리 김정기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름이 아니고, 너 혹시 입주 가정교사 할 수 있느냐? 너 동생하고 둘이서 자취하는 걸로 아는데 학교생활이 불편하지 않느냐? 괜찮으면 입주가정교사 자리가 하나 있는데 네가 도와줬으면 싶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네가 적임이라고 생각해서 너를 불렀다는 것. 광주서중3년생인데 일고입학성적 합격선에 불안하여 공부잘하는 학생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조선대학교 공대학장의 외아들인데 꼭 좋은학생을 부탁한다는 것.
나는 두말않고 가능하다고 답하고 말았다. 혼자 생활해야하는 동생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바로 대답을 하고말았다.
(동생은 동성중학 1년생, 아침에는 신문배달하고 오후에 학교가는 야간학생이었다. 동생도 운동을 좋아해서, 서중입학에 실패하고는..그애는 보성남교 축구대표선수를 했고, 결과적으로는 공부에 전년하지않아서인지 광주서중입학에 실패하고, 태권도 선수가 되어있었다...나중에야 나의 입주가정교사행이 동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졌다. 물론, 또 운명의 장난인지 장난의 운명인지 모를 일이나...혼자 생활하게되는 동생의 공부정서는 점점 멀어져갔다. 어머니는 나의 입주가정교사행을 반기면서도 동생의 홀로생활을 무척 걱정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동생의 운명일까? 형은 축구선수를 하지않아 서중진학을 했고 동생은 축구선수를 하여 서중입학에 실패했다? 나와 다른, 그의 또다른 운명인가?지금 생각해봐도 모를 일. 운명은 정말 정해져 있는가?)
입주가정교사는 어렵지 않았다. 함께 공부하면서 어려운 수학문제가 나오면 그 해법을 설명해주거나, 해석이 잘 되지않는 영어문장이 나오면, 내가 쉽게 해석해주는 정도였다.
공부에 관한한, 나는 기초가 튼튼하고 수업을 성실하게 받아온 정말 모범생이었으므로, 1년전 배운 중3 교과서는 거의 모르게 없어서 중3의 질문을 해결해주는데 아무런 고충이 없었다.
함께 공부하고, 한방에서 조금 늦게 잠자고...내일모레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므로 잠자는 시간이 아무래도 더 늦을 수밖에 없었으니, 나는 자연스레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에 자야했다. 나의 수면시간이 1시간정도 줄어든 것 외에는 입주가정교사일은 모두 좋았다.
특히나 좋았던 것은, 1차적인 본능문제, 먹는 문제인데, 도시락반찬이 달라졌다는 것.도시부잣집 아이들이 싸오는 도시락처럼, 달걀부침이 밥위에 떡하니 덮고 있었고, 콩자반은 물론 쇠고기장조림이 별도의 반찬그릇에 담겨있엇다.
나는 이제 점심시간에 옆짝꿍 눈치볼 필요가 없어졌으며,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나는 내짝꿍에게 호기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야, 이 반찬 좀 먹어봐!’
조선대 공대학장 관사.
광주시 서석동 420-8번지, 아직도 번지수가 기억된다. 맞을 것이다.
큰방1, 작은큰방1, 작은방1, 그리고 거실과 작은 욕탕.
큰방에는 부모님이 작은큰방에는 세자매와 식모가, 나는 작은방에서 서중3년생과 함께 기거하였다.
주기적으로 목욕도 해야했다.(그때 나의 광주생활은 공중목욕탕에 가보지못하였다. 여름철에 등물을 하거나 보성에서 시냇물에서 목욕하는 것외에는 목욕하는 일은 없었다...유도시간에 도복을 입고 훈련을 하다보면 몸끼리 부딪치게 되고, 수업이 끝나고 나면 피부살갗이 하얗게 부풀어 올랐다. 창피한 노릇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목욕을 하지않으니 몸에 때가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니...내복을 벗으면 몸허물이 줄줄 떨어지곤 하였다. 모두가 겨울철 목욕을 정기적으로 하지않으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 나만의 문제는 아니고 대부분의 서민학생들이 그러하였을 것. 조금 창피하긴하였지만 그렇다고 죽을일,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그런면에서 나는 그방면은 얼굴에 철판이 깔려있었다....다른 일에서는,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다거나 혹 거짓말해야 한다거나, 누구를 잘못 말해야할때는, 내얼굴이 먼저 화끈거렸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못하고 얼굴이 벌거지고 어쩔줄 몰라하는 순진한 모범생 그 자체였다 g)
세자매중 둘은 나보다 손위, 큰누나는 4년위 그리고 작은누나는 1년위.
그런데 1년위 작은누나는 보다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바이올린을 켜고 성악을 즐겨하고 시문학에 꽤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여고2년생이었는데 나중에는 전대 영문학과로 진학하였다. 큰누나는 전대 국문학과. 후일 나는 무슨 인연인지 반중매쟁이가 되어 내 친한친구의 형과의 혼사에 반중매노릇을 하게 되었다. 양쪽집안을 내가 알다보니, 시시콜콜한 것은 나에게 양쪽에서 물어왔던 것.
그런데 큰누나는 작은누나에 비해, 덜 살가운 편이었다. 지금도 그렇다...식모가 있었는데 ‘이순이’라고 불렀다. 내게는 잘 해주었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었다. 동병상련?
입주가정교사때, 최초로 라면이 출시되었다. 라면을 끓이면 국물위에 먹을직스러운 기름이 둥둥 떠있어서 더욱 먹고싶었던 기억이 있다. 새로 귀하게 나온 라면이 내차지까지는 되지않았다. 외아들이며 귀하게 자란 수험생 몫으로 제한되었다. 표나지않는 신분상의 차별?이었다. 부인할 수 없지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입주가정교사일은 내 인생에 있어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는 고마운 환경이었다.
보성시골에서는 느낄 수 없는, 멋있는 집 그리고 식구들과의 화목한 가정환경..선진 또는 고급 광주상류사회의 일단이라고 할까?
일화하나; 학교가 일찍 파하는 날이면 귀가한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서중3년생이 집에 없으면 나는 내 할 일 말고는 달리 마땅한 일이 없었다. 그날 복습과 내일 예습을 긑내고 나면 더욱 그러하였다. 안방에 몰래 들어가 공대학장의 서가에서 책을 빼내 읽기 시작하였다. 대원군. 조선총독부. 월부책장수가 팔아먹었을 전집을 내가 모두 읽어주었다. 문학작품들이 서재에 있었다면 나의 인생은 또 달라졌을까? gg
(대학2년때, 대학신문 ‘상록’의 기자가 되고싶었다. 상식과 간단한 작문을 끝내고 면접시험. 감며깊에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면접위원이 물었다. 나; 대원군!. 면접위원들 모두가 갑자기 조용하였다. 물론, 그 다음날 합격자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최소한, ‘데미안’ 이거나 ‘좁은 문’정도가 예상되는 답이었는데..나는 무심코 ‘대원군’을 불러냈으니 그들이 실망했을 것.
나의 운명이 또 바뀌는가? 아니면 이미 정해져있다고 했던가? 내가 대원군대신 데미안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학보사 기자가 되었을까? 나는 직업상 상사맨이 되었읆까?)
서중3년생은 다행히 일고합격했다. 나의 도움 덕분인지 그의 노력때문이지 모를 일. 나는 그 덕분으로 입학시험이 끝나고도 봄방학까지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무노동 유숙식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가정교사를 그만두고도 나는 주기적으로 그댁에 인사차 들리곤하였다. 명절날이라든지 서울에서 대학다닐 때 방학때면 어김없이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런 나를 공대학장은 대단히 대견스러워하셨고 뭔가 열심히 말씀을 해주셨다.
다른 식구들하고도 좋아지냈지만 특히 전대 영문과다니는 작은누나와는 편지왕래도 하면서 특별한 인연을 이어나갔다.
여름방학때는 전대문리대 영자신문 학보사로 찾아가기도 하고(지금 기억에는, 문리대의 등나무 벤치그늘이 좋았다), 서울에서는 큰누나 산후조리때 서울에 머물때는 내가 수원에서 정릉까지 찾아가 그동안의 밀린 회포를 나누기도 하였다. 무슨말을 주고받았는지 아무 기억도 지금 없지만...연애감정일지 그냥 손위아래 가까운 누나동생사이일지, 미적지근한 관계였다. 한때는 내가 '좁은문‘을 빙자해서 알리샤와 제롬의 관계를 풀어가보려했지만 더 이상 진도는 나가지않고 시계는 거기서 멈춰버렸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선문답만 몇 번 하고는 나는 유신발령후 운동권일체군대소집령에 따라 전격 입영하고부터 소식이 끊어져버렸다.
나의 이일을 알고있는 몇안되는 선후배들은, 말하기좋게 ‘연상의 연인’ 운운하며 놀려대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이것도 운명, 정해져있는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