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 당번은 나.
저녁식사 당번은 나.
우리 자취방 식구는 모두 광주고 3년생 둘 그리고 서중1년 나 하나.
아침식사당번은 일찍 일어나는 수험생들인 광주고3년생 둘이서 번갈아서 해내고, 저녁식사당번은 오후시간이 많이 나는 서중1년생인 내가 책임.
그때 주식은 뭐니뭐니해도 쌀밥이니 쌀밥하는 것이야 큰문제가 없었다. 쌀 씻어서 연탄불에 알맞게 맞추어 밥을 하면 그만. 처음 몇 번은 설익게 하기도 하고 조금 태우기도 했지만 곧 익숙해져 밥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때로는 기술적으로 조금 늦게 밥솥을 꺼내면 누룽지가 생기게 하기도 해서 식사후 구수한 숭늉맛을 볼수도 있게끔 되었다.
문제는 마땅한 부식거리가 없는 것. 그래도 겨울에는 김장김치가 있고 된장도 있어서 가끔 된장국이나 김칫국을 만들어 먹으면 입맛이야 모두 왕성한 때인지라 밥한그릇 해치우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여름철 식사.
매일 된장국을 끓이는 것도 하루이틀. 그래서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취집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부식거리를 사다가 국을 끓이는 것이었다.
그때 가장 애용했던 것이 콩나물이나 두부 양파 감자 호박등 그러다가 가끔은 꽁치. 그때는 서민들 먹거리로 꽁치만한 것이 없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우리들 자취생들에게는 최고식품이었고 고마운 영양식이 돼주었다.
쇠고기는 비싸서 한번도 맛볼수가 없었고 돼지고기는 어쩌다 한번. 자취생 누군가의 특별방문손님이 주로 고향에서 오실 때 돼지고기 반근 정도면 그만이었다. 내기억으로는 돼지고기 한근을 사오는 특별손님은 없었다.
꼬맹이 중1년생이 13살짜리 어린학생이 언제 학교숙제는 해놓고 또 언제 밥을 하고 또 구멍가게에서 부식거리를 사다가 국을 끓이는 시츄에이션을 그려보시라. 상상이 되시는가요? 재미있으시나요? 안쓰러우시나요?
내 아들이 지금 그리 하고있다면 애비인 내마음이 어떠할까요? 지금 나의 옛이야기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회상하며 정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애처롭기가 최상급 아닌가 싶네요.
또 들어오는 생각하나. 만일 내가 보성고향집에서 보성중을 다녔다면 공부만 하였을 것이고 시골출신이 느끼는 광주생활의 위화감을 전혀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이런 위화감같은 것을 스스로 감당하고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었을 텐데, 어린나이의 광주생활이 나의 성장과정에 어떻게 작용했을지 궁금.
숫자로 나타나는 영향이야 알 수 없겠지만 겉으로 나타나지않는 내재적 요인이야 왜 없을까? 어린나이는 부모님 슬하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충분히 보살핌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임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일진대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
반대로 부모슬하를 떠나서 일찍 물설고 낯선 곳에서 객지생활을 했으니 오히려 독립심을 길러서 좋았겠다싶지만...그 위화감과 혹 있을수 있는 정서적 결핍 또는 불안요소가 마음속으로 들어가 잠복하지 않았을지...아무리 큰 독립심을 얻었다해도 그것은 손해보는 장사임에 틀림없었다 생각된다. 내 아들이 다시 그런 경우와 맞닿는다면 나는 허울좋은 독립심은 꿈도 꾸지못하게 하고 내슬하에서 알맞게 학교공부하고 남는 시간은 마음껏 뛰어놀면서 중1년을 보내게 할 것이다.
더운 여름밤의 추억또하나;
여름방학 전이거나 여름방학 후 즈음의 여름밤은 더웠다. 경양방죽이 얼마 멀지않아 가끔 밤바람을 쐬고 다녀보기도 하엿지만 긴 밤을 그냥 쉽게 넘기기가 간단치 않았다. 그때 자취생들을 흔들어대는 것은 ‘아이스케끼’ 였다.
덥고 또 더운 여름밤, 자취생들의 궁금한 뱃속을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구슬픈 아이스케끼장 수의 ‘아이스케끼’ 였다.
누군가의 호의로 또는 모두의 십시일반으로 여름밤 아이스케끼를 먹는 맛은 꿀맛 그것이었다. 그때 ‘부래옥’ 아이스케끼가 최고 인기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