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만 되면 보성으로...
토요일만 되면 보성으로...
보성집을 떠나서 광주생활을 하는데 어쩔수 없이 보고싶은 게 부모형제들이었다. 주말만 되면 나는 기차를 타고 보성으로 달려갔다. 주말이 오기전에도 보성집에 가고싶어 자취집화장실에 가서 몰래 혼자 울기도 하엿다. 몇 달이 지나니까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지만 난생처음 부모떠나 객지생활하는 13살짜리는 어린아이였다.
주말만 되면 기차로 내려오는 아들을 보고 부모님이야 안쓰러워하셨지만, 그때 초등학교선생님이던 작은형은 나를 몹시도 나무랐다. 다큰놈이 객지생활을 견디지못하고 비싼 기차삯내고 주말마다 내려오느냐....
이때의 정서가 나의 성장과정에 어떻게 영향 미쳤을지 궁금하고 아무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앞에서서 잠깐 언급한바있지만 만일 내가 광주서중에 가지않고 보성중에 진학하였다면, 광주 객지생활을 하지않고 집 가까운 보성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나의 성격형성에 어떤 영향이 있어Tdmf까 나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나의 운명인가 나의 선택인가? 적어도 이때는 나의 의지가 실린 나의 선택을 아니었다. 분명하게도...
매주 토요일만 되면 무조건 당연히 보성에 내려가던 것이 3개월쯤 지나서는 한달에 한번 내려가는 것으로 조정되엇다.
3개월 정도 지나니 학교생활도 점차 안정되어가고 자취생활도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자취생활을 하는 것이니 한달에 한번 내려갈 때, 한달 생활할 수 있는 쌀과 반찬을 가져와야 했다. 내가 한달동안 먹을 쌀은 대충 그때는 1말2되 정도 그러나 어머니는 좀더 여유잇게 1말 2되나 3되는 줬던 것같다. 보통 시골에서는 쌀이 떨어지는 여름철에는 거의 꽁보리밥을 식구들이 먹는다. 아버님만 예외로 소위 반섞기 즉 쌀반 보리반 정도의 식사를 하실 뿐 나머지 식구들은 꽁보리밥으로 끼니를 챙긴다. 물론 점심은 거르기도 하고 수제비 밀죽으로 떼우기도 한다. 그런데 광주에 자취하는 아들에겐 쌀70보리30정도로 섞어서 주셨다.
쌀과 보리가 섞여잇어서 취사하다보면 보리가 충분히 익지못하여 밥알이 튕겨나올 지경도 겪어야해Y다. 도시락을 학교에서 먹을때 옆좌석 짝궁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였다.
보성은 기차가 다녀서 버스는 이용하지않았다. 시골집에서 기차역까지는 거의 1시간 정도 거리. 1말이 넘는 쌀자루와 김치통이나 된장통을 집에서 보성역까지 운반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보통 집머슴 점수가 지게도 역까지 갔다 주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내가 김치통이나 된장통을 가지고 가야했다. 참 쉽지않았다.o
더 고통스러운 것은,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 김치통에서 김칫국물이라도 새어나올때는 그 냄새 때문에 몸둘바를 몰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다들 그렇게 자취생들은 한달 살림살이를 고향에서 광주로 실어날라야해Y다.
문제는 또 있었다. 광주역에 도착하면 쌀과 김치된장통을 어떻게 자취방까지 운반하느냐였다. 광주역에서 짐꾼을 사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그 짐삯을 아끼기위해 때로는 쌀자루는 등에 지고 김치통은 손을 번갈아가며 운반하는 것이어YT다. 여간 힘들 일이 아니었다.
또하나 더 괴로운 일은, 주변에 여학생이라도 볼까봐 괜히 눈치를 살펴야했던 것.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가소로운 일이었지만 그때는 꽤나 신경쓰였다.
왜 나는 광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 가끔씩 자문해보곤 하였다.
토요일이 되면 광주친구들은 집에 일찍가고 영화도 보곤 하는데 왜 나는 보성에 가서 한달 생활할 쌀과 김치를 가져와야ㅏ는지, 보성에 가지않는 날은 밀린 빨래를 해야하는지
주인집 아저씨처럼 방 몇 개 세를 놓아 자식들 학교보내고 여유있게 사는데 왜 나는 시골에 태어나서 어렵게 생활해야하는지 왜 무엇 때문에??? 어린 가슴에 품게되었던 의문이어YT다. 도시와 농촌은 왜 사는 것이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