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서중.일고 시절(1964-1970)

첫 자취방=광주시 계림동 경양방죽옆 '주인아저씨는 밤10시만 되면 전깃불을 꺼버렸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8. 27. 23:13

나의 첫 자취방=광주시 계림동 경양방죽옆, '주인 아저씨는 밤 10시만 되면 전깃불을 꺼버렸다.'

1964년 3월.

보성촌놈이 드디어 광주에 왔다. 내나이 열세살.

역사적 순간일까? 아버지를 따라 광주역(구역.현재 광주역은 신역)에 내렸다.

초등학교4년때, 한양대공대휴학하고 산수동 막내 이모집에서 놀고먹던 큰형 찾아오라는 어머니 명령받들어, 산수동 이모집 주소하나 들고 광주에 온 이후, 두 번째길.

아버지는 쌀자루 하나, 나는 김치통 하나. 한달 자취생활하기 위한 양식과 반찬.

보성과는 비교가 엄두나지않는 광주였지만, 시골촌놈인 나의 눈엔 번화한 광주거리 보다는 먼저 내눈에 띄는 것은 시민회관의 영화간판. ‘몽고의 동쪽’ 장동휘 주연. 여주인공은 기억에 없다. 김지미? 김혜정?

왜 그때 광주의 그많은 것중에서, 우리동네 어느집 사랑방 벽지에 붙어있던 ‘몽고의 동쪽’ 영화광고가 새삼 내눈속으로 되살려져 들어왔을까?

보성촌놈인 내가 벌써 무슨 영화광이 된 것이 아니고 또는 내가 무슨 영화에 천재적인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고, 단지 ‘몽고의 동쪽’이 시사하는 바, 우리 한민족의 시작이 몽고 어디에서 이고 한민족의 이동은 몽고의 동쪽, 만주 그리고 한반도가 그려지는 것이니, 나는

광주에 오자마자 처음 했던 일이 영화보는 것이었다니 누가 들으면 별난놈 하나 광주에 왔그때 비록 어렸지만 민족혼같은 무엇으로, 광주에 오자마자 ‘몽고의 동쪽’을 찾은 것이리라.

쌀자루 하나와 김치통 하나 각각 들고서 영화관에 들어간 보성시골 부자지간이라!!!

모르긴해도 시민회관 역사상 대단하고도 특별손님이 내방한 것 아니었을까?

(우리 아버지께서는, 셋째아들인 내가 보성역사에 남을 서중에 들어갓는데, 무엇인들 못해주겠나싶게...몽고의 동쪽을 보자하니 그래그래 하셨을 것...상상해보시라!!! 쌀자루 들고있는 시골아저씨=아버지와, 서중모자쓰고 김치통 들고 들어오는 중학신입생=셋째아들이 텅빈 영화관에 입장하셨다~~)

 

시민회관에서 영화를 보고 대인시장을 거쳐 철길따라 부자는 말없이 걸었다.

아버지는 주소하나를 들고 산수동5거리 이집저집을 수소문 끝에 어느 단칸방 자취집에 나를 남겨놓고 보성으로 바로 내려가셨다.

저녁무렵이 되자 시골옆동네 먼친척삼촌뻘 되는 광주고3년생이 왔고 저녁상을 차려주는데 퉁명한 양은밥그릇에 쌀밥을 가득 담아주었고 반찬은 김치 한보새기가 전부였다. 밥상은 없고 맨방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 위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광주의 첫저녁밥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광주고3년생은 책상과 이불짐등을 손수레리어카에 싣고 광주고가 가까운, 경양방죽근처 계림동 어느 양옥집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내가 1년동안 자취할 집, 단칸방이었다. 또다른 광주고3년(장흥중 출신)과 셋이서 한방을 쓰게 되었다.

광주고와 가까운 곳에 자취방을 얻은 것이었고, 광주고까지는 걸어서 10여분 거리, 루문동의 서중까지는 40여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나는 얹혀사는 형편이었는지 한결 먼통학거리에 대하여우리어머니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나의 광주유학생활, 서중1년은 계림동 자취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기억나는 몇가지는;

주인집 아저씨는 밤10시만 되면 전기두꺼비집을 내려버려서 자취방모두를 자동소등시켜버렸다. 전기세를 아끼자는 것인데 광주고3년 수험생들은 씩씩대며 불평을 해대었다.

집주인아저씨는 밤10시가 되면, 전깃불을 꺼버렸다.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야박하게 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주인집 아저씨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한번도 웃는 모습을 본적이 없고 항상 찌뿌등하게 흐린 날씨였다. 조대공전에 다니는 큰아들, 광주여고에 다니는 큰딸 그리고 말썽꾸러기 공부안하는 작은아들, 할머니...그리고 아저씨.아주머니; 모두 6명.

안방.작은방.상하방중 하나에서 모두 6명이 살았고, 월세자취방은..문칸방,상하방중 하나, 별채에 방2; 모두 6방에서, 조대부고야간1명+광주상고야간1명, 광주상고야간1명+1명/누나, 광주고3명 그리고 나 광주서중1명, 자취생 모두 6명이 살았다.)

(조대부고야간생은 현대문학을 창간호부터 수집하는 문학청년지망생이었고, 광주상고야간생은 아침에 신문돌리고 야간에 학교...또다른 광주상고야간생은, 화순동복의 부잣집 손자...공부는 하지않고 기타치며 노래하니 손자하나 바라보는 할아버지, 가끔 찾아와 속만 태웠고...광주고 3년생 2명은 육사시험준비하느라 촛불켜고 열공...광주고1년생은 장흥중 배구선수출신으로 고향여학생과 연애편지쓰느라 하하 그 속에서 나는 까까머리 중1년, 저녁밥당번..그날 숙제와 다음날 예습을 모두 끝마쳐도 밤10시가 되지않아...졸리움을 참느라 매일 고생 그러나...광주고3년 형들 덕분에, 나는 학교공부의 기본=복습과 예습을 습관화하여 공부잘하는 모범생이 될 수밖에 없었고, 중.고등학교 내내 우등생이 되었다.ㅉ.ㅉ.ㅉ.)

 

광주고3년생들은 전기불이 꺼지면 촛불을 켜서 부족한 공부를 계속하였다. 육사합격을 목표로 한다 하였는데 모두 열심이었다. 육사는 전액장학금이라하여 대학등록금이 한푼도 들지앟는다하여 시골출신 광고생들의 최우선 목표라 하였다.

나중에 모두가 떨어졌다. 육사가 그리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인가 싶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중에 내가 일고3년이 되고나서야 왜 그리 육사 들어가기를 힘들어했는지 이해가 되지않았다...일고 우리반에서는 30-40등 정도만 해도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았는데, 하물며 나는 1등을 하였으니, 그때 광고3년생들의 '열공'이 얼른 이해되지않았던 것이다.)

(문칸방에는 조대부고 야간학생이 세들어있었는데 문학청년지망생이었다. 현대문학을 창간호부터 보유하면서 매월 발행되는 현대문학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으고 있던게 특이하였다.

그의 룸메이트는 광주상고 야간생. 아침에 신문돌리고 야간에 학교를 갔다.)

 

나는 건너채의 조금 큰방에서 광주고3년생 둘과 나, 셋이서 자취했는데 그 옆방에는 화순동복의 부잣집 손자가 누나와 함께 자취하였다. 가끔 할아버지가 오시는데 몇 대독자의 손자라 하며 그 손자를 어찌나 귀히 여기는지 부러웠지만, 그 손자는 지독히도 공부와는 멀리 떨어져지냈고 간신히 광주상고야간에 적을 두고 있었다.(전기값을 아끼려는 주인집 아저씨를 보고, 어린 나는 별 생각을 해보았다. 시골에 사시는 우리부모님은 농사일을 하시면서 아들 광주유학보내는데 단칸방 자취생활시키는 것도 힘이 드는데, 주인집아저씨는 방 몇 개 세주면서 아들딸들 학교에 잘보내는데 어찌 불공평하지 않은가? 나의 이런 문제의식은 나의 성장과정 곳곳에 밑바탕에 깔려나갔다.)


밤10시만 되면 불을 꺼버리는 주인집아저씨.

10시만 되면 불을 꺼버리는 주인집아저씨가 속으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복습과 예습을 모두 끝내고도 시간이 남아 빨리 잠좀 잤으면 하는데, 광주고3년생들은 더 공부를 해야하니 불을 끌수가 없었는데 주인집 아저씨가 강제로 불을 꺼주었으니 하느 말이다.)

아침밥 당번은 광주고3년생들이 번갈아하고, 저녁밥은 내가 책임이었다.

저녁을 먹고나서, 그날 배운 것들을 복습하고 다음날 배울 것을 예습하고 나면 그래도 밤 10시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위인전중 위인몇개를 읽고나도 시간은 아직 남았다. 잠은 쏟아지고 어서 잤으면 싶은데 수험생들인 광주고3년생은 잘 생각을 하지않안T다.

이때 주인집아저씨가 전기불을 꺼버리는 그 시각이 내가 잠자는 시각이었다. 이 어찌 고맙지않을소냐.

나의 서중3년 학업성적은 빼어났다. 시골출신치고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3년우등을 얻어냈으니말이다. 그러나 우리집 어느 누구도 이를 눈여겨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 당연히 셋째는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특별히 머리가 매우 뛰어났다는 것보다는, 광주고3년 수험생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매일매일 공부하는 것이, 그날 배운 것은 그날 복습하고, 내일 배울 것은 또 그 전날 예습하고 학교에 가니, 선생님 강의하는 것이 모두가 쏙쏙 머릿속에 박히는 게 당연할 것. 기본적으로 기억력이 남보다 못하지않고 또한 딴 잡생각이 없는 백지상태이니 새로운 지식이 그대로 스폰지 빨아들이듯 머릿속에 저장된 것이리라.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공고되면, 2주전이나 1주전부터 그동안 배운 것을 정리하고 하루이틀 남기고는 지금말하면 소위 서브노트까지 해가지고 등하교40여분동안 메모를 보면서 외우고 다녔으니 시험성적이 좋을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었지않은가, 우등생이 안되는 것이 이상하지않겠는가, 지금 생각해본다.

광주고3년생들과의 중1년생활이 나에겐 매우 학구적 기본자세를 몸에 배게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또한 운명인가? 나의 선택인가? 이는 나의 의지가 작용한 선택이라기 보다는 어떤 보이지않는 운명적 만남..아닐까?

하나 아쉬운 점은....나에게는 책상 마련할 경제적 형편이 되지못해서, 전등불밑에서 배깔고 복습.예습을 할 수밖에 없엇다는 것...어깨가 구부정하게 된 것이 이때 만들어진 것 아닐까?

구부정한 어깨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왓던가? 어깨를 펴라 어깨를 활짝 펴야한다 하면서도 그리 되지않으니...남 보기에 좋지않을 것이니 ...

특히 여학생들이 어찌 볼 것인가를 생각하면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았더니 이를 어찌 다스릴 것인가?2018.8.9.치앙마이에서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