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년(보성남초)시절(1951~~1964)

나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2개.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8. 27. 22:52

나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2개.

우리동네(보성읍 옥평리 가는골 154번지)는 30여가구가 사는 아주 작은마을. 그중에서도 함양박씨가 많이 사는 함양박씨의 집성촌.

작은마을이다보니 취학년령대가 많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1951년생도 나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위1950년생은 둘이나 되었다.

우리동네에서 보성읍내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걸리는 거리. 어린아이 혼자서 등하교 하기는 조금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8살되는 해에 학교를 혼자 다니는 것보다, 7살에 1950년생들과 함께 취학하게 되엇다. 특별히 조기교육을 시키고자 해서 보다는 한마을친구들과 함께 등하교 편의를 위해서 7살에 입학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조기취학은 그때 보성군 교육구청(나중에 보성읍사무소로 전근)에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도움도 받았을 것이었다.

그당시의 시골 초등학교는 7살 취학어린이는 거의 없고 오히려 한두살 또는 서너살 위와 함께 다니는 게 일반적이었다. 호적을 제때 등재하지않아 실제 나이보다 한두살이 많기는 보통이었고 심지어는 서너살 위도 있었다. 집안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다니기도 쉽지않아 집안일을 돕다가 늦게 취학하는 경우도 많고 많았다.

 

7살에 학교를 일찍 다녀서인지 학교생활에 그다지 흥미를 크게 갖지못하고 지각도 많이 하고 가끔 결석까지 하면서 그럭저럭 마지못한 듯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어느 선생님은 학교에 자주 찾아오는 어떤 학부형의 아들에게 소위 신용을 많이 주어, 나같은 학생에게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니까 책가방만 아니 그때는 책보따리만 들고 학교에 왔다갔다하는 말하자면 놀고먹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4학년이 되면서 크게 바뀌게 되었다. 마침 담임선생(안효선생님)이 우리 큰누나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는데 내가 그 남동생임을 알고 특별히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큰누나가 보성여중을 2등으로 입학할 정도로 성적우수졸업생이었으므로 그 동생인 나도 공부를 잘 할 것으로 기대한 것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나의 수업태도는 급변하였고 보는 시험마다 최고p어느때부터인가 나는 보성남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며, 축구선수를 하지못하게 하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배려까지 해주게 되었다.

 

얄궂은 운명일까? 아버지가 보성읍 산업계장에서 강제실직(5.16후 민정이양때 정치적 관계로 강제 퇴직?)되고나서, 시작한 광주 대인시장의 옷가게 사업이 잘 풀리지않자, 보성읍내에서까지 내노라하는 부농중의 하나였던 우리집안의 경제사정도 날로 좋지않게 되었다.

아버지의 고정월급수입이 농삿일로 얻어지는 수입에 겹쳐 큰살림이 유지되었는데 졸지에 아버지의 월급이 없어지고 또한 사업실패로 인한 부채까지 떠안게 되었으니, 가정경제사정이 기울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내가 6학년이 되었고 중학시험을 봐야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광주서중에 원서를 내라는 것이었다. 집안의 경제사정이 광주유학갈 형편이 아닌데도, 셋째아들이 공부를 잘하니 광주서중에 도전해보라는 것이었을까?

아버지 옷가게가 광주에 있으니까 학교다니기에는 나쁘지 않아서였을까? 그렇다해도 아무래도 무모할 수 밖에 없었다.

보기좋게 미역국을 한그릇 먹고말았다. 보성남교에서는 공부를 잘했다해도 우물안 개구리일뿐, 전혀 시험준비랄 것도 하지않은 보성시골내기가 합격한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선택 아니었을까?

왜 광주서중 시험을 보게 되었는지 왜 떨어지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른채 나는 어영구영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동기생들은 보성중에 잘들 다니고 있는데 나는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작은형의 손에 끌려서 보성남교에 가서 6학년때 담임선생님(정상기선생님, 순천사범졸.)을 만났더니, 김봉수선생님을 소개해주었다. 즉, 재독=다시읽기 하기, 다시 6학년을 다니게 되었다. 지금말로는 재수 아닌가?(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작은형은 그때 교직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8살에 입학한 녀석들과 같이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7살에 먼저 1학년이 되었으니 입학과 졸업은 1년 선배이지만, 이제 다시 6학년을 다니게 되었으니 졸업은 동기이게도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말을 놓은 졸업생 동기가 둘이다.

 

당연하게도 나의 성적은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내용을 두 번 배우는 것이니 나보다 더 잘하는 학생은 없을 수 밖에.

두 번 공부를 하다보니 모르는 게 없었고 수업받는 것이 더 재미있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광주서중 도전이 가능하게 되는 것같았다. 한번 떨어져서인지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도 자연 알게 되었다. 또 지난해에는 전과목 시험이 이번에는 국어.산수.체육만 보는 것이니 시골촌놈인 나에게는 광주출신 학생들과 경쟁하기에는 더없이 좋게 되었다싶었다.

지난해에는 연습을 전혀 하지않아 준비부족으로 체육점수가 좋지않았는데 이번에는 철봉.달60미터달리기.야구공던지기등 모두 합격수준을 충분히 넘을수 있도록 매일매일 준비하였다.

결과는 합격,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보성남교 개교이래 처음. 보성군 전체를 통털어서도 처음인 첫역사를 쓰게 되었다.

 

같이 광주서중에 도전한 절친 J는 광주북중으로 그리고 그당시 학군조정으로 보성교에서 보성남교로 전학온 공부잘한다던 ‘동’은 보성중 수석합격하게 되었는데, 보성남교의 경사였다. 내가 ‘재독’하면서 이끌어낸 메기효과가 아니었을까 지금 추측해본다.

(J의 집안은 보성읍내에서 엿방을 운영하면서 크게 고물상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안과는 우리할머니때부터 왕래가 있었으며, 꽤 부유하였고 특히나 그의 어머니는 보성읍내에서 알아주는 소위 인텔리여성, 학부모회장까지 지내었는데. 여러모로 아들의 광주서중에 진학시키고자 모든힘을 쏟는 듯 해보였다...그래서 공부잘하는 나를 엮어, 김봉수선생님댁에서 과외를 받게 하였다...나는 함께 공부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과외비를 내지않았다. 선생님댁에서 공부하자고 해서 그냥 따라했을뿐 그것이 그를 위한 특별과외인 것을 내가 성장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또 운명타령해보자;

만약 그때 중학입학시험이 전과목에서 국어.산수.체육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시골촌놈이 정보도 부족하고 전과목을 공부하려면 쉽지않았을 것. 더군다나 ‘재독’하는 효과가 그리 크게 나지 않았을 터...전과목이 아닌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잘된일인가?

만약 그때도 광주서중이 아닌 보성중을 선택했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까? 광주서중을 합격할 성적이니 당연 보성중도 수석입학을 했을 터...그랬다면 나의 운명은?

보성중학의 전통과 학풍을 생각하면, 필시 고급공무원이나 판검사가 되었을까?

상사맨이 되엇을까? 무역회사를 창업하고 지금의 경제적 부를 얻고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었을까?

 어린나이에 광주유학하면서 느꼈던 도시와 시골의 차이, 차별.불공평.위화감 등..도시출신들과의 보이지않는 경쟁,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기울어진 운동장', 출발선이 이미 다른 불공정경쟁..필연적 약자...약자가 가져야하는 소외감.위화감..어린나이 극복해야하는 문제들...피할 수 없는 눈치보기..정서적 균형감각상실?등, 지금 나와는 어떻게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