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년(보성남초)시절(1951~~1964)

1963년 섣달 그믐날...광주서중 합격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8. 27. 22:28

.1963년 섣달 그믐날...광주서중 합격

여느 세밑처럼 아니 그때 세밑은 훨씬 세밑다웠다.

왠지 넉넉함이 가득하였는지 날씨조차도 푸근푸근하였는데 또 때마침 싸라기 눈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의 우리집 마당은...시골집마당으로는 매우 큰, 정말 푸근하고 풍성하였고 닭들은 집안뒷뜰 장독대 여기저기, 강아지는 마침 내리는 싸라기눈따라 요리조리 뛰어돌아다니고 있었다. 넉넉한 평화.

상머슴 점수는 떡매질 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퍽.퍽.딱.딱~~~

가마솥에서 막 퍼나른 꼬들꼬들한 찰밥덩어리가 마당한가운데 펼쳐져있는 멍석위. 물기먹음은 반질반질한 떡판위에 부려졌다.

머슴 점수의 이마에는 땀이 방울방울, 떡치는 소리는 섣달 그믐날을 더 넉넉하게 하는 듯,

인절미 만드는 떡매질소리가 섣달그믐날 이른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때 뒷방사랑방에서 이블을 둘러쓰고 얄개전 조흔파작?을 읽으며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입학시험을 치른 학생이 아니다싶게하려했을까 아니면 아무생각걱정없이 무심한 녀석이었을까싶게 그냥 그시절 유행하던 명랑소설을 읽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태평천하...정말 철이 하나도 없었으니 아니 아예 걱정없는 놈으로 태어난 것일까?!

‘전보요 전보 왔어요~~~’

광주의 큰형 친구가 보낸 광주서중 합격통지 전보였다.

그땐 전화기도 없고 급한 소식을 전하려면 전보만한 것이 없었다.

손편지를 쓰고 부치려면 며칠이 걸렸고 인편으로 소식을 알리려면 하루에 한두편밖에 없는 기차를 이용해야하는데 일반사람들에게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그런 전보가 섣달그믐날...싸라기눈이 함박눈으로 바뀐 늦은 오후에 들이닥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서중 합격이 무엇인지 얼마나 좋은 것인지 헤아려지지않았다.

보성남교 담임선생님이 오시기전까진 우리집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좋은일인지, 어찌 좋아해야ㅗ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김봉수선생님이 숨을 몰아쉬면서 우리집에 오시더니 불문곡직하고 어머님을 번쩍 등에 업고는 우리집 그 큰마당을 몇바퀴나 돌고 도는 것이었다.

힘이 더 나오지는 않는지 이제는 어머니를 내려놓으시더니 이제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무슨 소린지 소리소리 질러대는 것이었다.

마침 내리는 함박눈과 함께 늦은 오후 섣달 그믐날, 우리집의 섣달 그믐날은 여느 해보다고 풍성하고 푸짐하고 넉넉하게 저물어가고 있어Y다.

집에서 넘어지면 닿는 곳, 보성중에 가지않고 물설고 낯설은 광주땅 광주서중을 가는 것이 과연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운명이란 무엇인가?

보성중이 아닌 광주서중 진학은 나의 선택인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아니면 아무도 뭐라 못하는, 보이지않은 신, 조물주가 이미 짜놓은 그 운명인가? 만사개유정이라더니 그 개유정?

그때를 회상하면서 정리하고있는 지금 운명이란 있는 것인가? 나의 의지, 나의 선택은 그 운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우리 인생살아가는 우리삶이 재미있는 것이 바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가 아니면 그 운명조차도 나의 의지와 나의 선택이 결과해내는 그 운명인가?

(살아가면서 여러 고비고비에서 운명적 사건을 만나고는 곧잘 생각하곤 한다. 운명인가? 선택인가? 아니면 나의 의지가 반영된, 나의 선택이 이끌어낸 운명인가? 자문자답해보지만, 그때 보성중이 아닌 광주서중의 선택은 어떤 운명이어Y다. 그때는 나의 의지, 나의 선택은 없었다.

내가 아는한 그때 우리집 경제사정은 내가 광주로 유학갈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어떤 생각으로,셋째아들의 장래를 어떻게 하시려고 보성중이 아닌 광주서중을 도전하게 하였는지...나의 운명>?

 

깡시골(그때 우리집은 전기불이 들어오지않았다) 아주머니로는 통이 좀 크신 우리어머니; 점수야, 광에 가서 쌀 한가마 가져오너라. 그리고 저 선생님 댁까지 다녀 오너라, 하시는 것이어Y다.

보성남국민학교(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 하였다) 개교역사이래, 아니 보성군 전체를 통털어서, 보성에서 광주서중 입학은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니, 경사는 경사였다. 보성군내의 경사일뿐 아니라 특히 담임선생님에겐ㄴ 대단한 축복사건이었을 것 아닌가...

거기에 쌀한가마를 보너스로 받는 것이니 우리 김봉수선생님 그날 참 좋은날g

소위 광주서중 합격턱을 통크게 쏘신 것이다.

함박눈길따라 우리 선생님은 함박웃음띠며 걸음걸음마다 덩실덩실 춤추며 읍내로 되돌아가셨다.

1963년 섣달 그믐날 오후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이윽고 다음날은 1964년 1월1일. 새해가 밝았다.

1964년 3월. 나는 광주서중 1학년 7반.

나의 광주유학생활은 시작되었다./2018.8.7.치앙마이에서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