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2)(독서노트)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헬렌 니어링...2011.11.15

햄릿.데미안.조르바 2013. 2. 8. 16:30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자유로운 영혼, 헬렌 니어링, 그 감동의 기록

-더 이상 같이 있지못하는 우리 두사람

저 가을산을

어떻게 혼자 넘나

우리 둘이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중국 7세기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떠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53년동안 함께 살았던 스코트가 만 100세가 된지 3주일만에 메인에 있는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날 하나의 장이 막을 내렸지만,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이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그이는 오랫동안 최선의 삶을 살았고, 일부러 음식을 끊음으로써 위엄을 잃지않은 채 삶을 마쳤다. 나는 느슨하게 그이 손에 마지막까지 쥐어져 있던 고삐를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내삶을 꾸려갈 수 있다. 나는 의기소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머리 위로 새가 슬퍼하며 날아다닌다고 해서 우리 머리에 새 둥지를 틀게 할 필요는 없다’는 고대 중국의 격언이 생각난다.

‘부부중 한 사람이 상대방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삶의 연속성이 상처받고, 감정의 안정이 멈추며, 외부의 자극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까지 삶의 흐름이 중단되고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그 중단된 시간은 끔찍합니다‘

스코트가 떠난 뒤 몇 달은 내 정신에서 축복받은 공백의 시기였다.

루이스는 <눈에 보이는 비통함 A Grief Observed>에서 이렇게 썼다.

‘잃음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에 뒤따라오기 마련인 한 부분이다. 결혼이 구혼에 뒤따르듯, 가을이 여름 뒤에 오듯 사별은 결혼에 이어서 온다. 잃는다는 것은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국면이며, 춤의 중단이 아니라 그 다음 차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있을 때 그 사람 손에 이끌려 우리는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앞에 남아 있도록 배워야 하는 것이 이 춤의 슬픈 장면이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동안 물건을 정리하고 집안일 책 원고 농장에 관한 일들을 적절하게 결정하여 정리한 뒤 나 또한 홀로 떠날 것이다. 나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사실 이제 떠난다고 해서 결코 이르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특별히 운이 좋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왓으며, 이제 나날이 되풀이되는자질구레한 일에서 빠르게 떨어져나가고 있다. 만일 저 반짝이는 바다가 가라앉게 된다면, 나는 기쁘게 내 몸을 그 속에 잠글 것이다. 그리고 저 너머 도달한 곳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면, 나는 잠깐 숨을 쉬고 주위를 돌아본 뒤에 기꺼이 그 일고 맞닥뜨릴 준비가 되어 잇다.

나는 앞으로 남은 삶의 열쇠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우리가 가기로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갈 t n 있으며 평화롭고 고요한 가운데 위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코트가 그랬듯이 음식 먹는 일을 멈출 수 있다. 죽음이 우리의 목적이라 한다면, 음식은 우리를 육체에 매이게 하는 미끼요 독이다. 육체에 음식물 공급을 멈추면, 육체는 기울어져 죽음에 이른다. 죽음은 삶의 모험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육체가 끝나는 것일 뿐이다.

간디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면 할수록 헤어짐에서 오는 슬픔이 아마도 가장 큰 망상이라고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망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가 친구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서 우리가 보는 실체 때문인데도, 우리는 잠깐동안 그 실체를 덮고 있던 껍데기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합니다. 실체의 죽음, 실체와 이별하는 일은 없습니다.

진실한 우정은 겉껍질이 사라진 뒤에도 그 실체를 만나고 지켜집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은 1세기에 티아나 Tyana의 아폴로니우스Apolonius가 남긴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뿐이다. 실제로 창조되거나 사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게 될 뿐이다’

스코트는 언젠가 죽은 뒤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친구의 질문에 답장을 쓴일이 있다.

‘나는 다르게 묻고 싶네. 사람은 그가 속해있는 우주와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는가? 내가 이르게 된 결론은 삶이 본질에서 아주 다른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일세. 삶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이고, 그 복합적인 것의 하나는 삶이 길거나 짧은 지속기간을 갖는 여러 조각들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네. 그리고 어떤 조각의 삶이든 이 땅에서 우리 삶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몸의 기관보다는 영속적이라네’

우리삶에는 너무 많은 ‘나’가 있다. 저마다의 인격은 우리의 본체[가 아니라 우리가 걸치고 있는 무엇이다. 우리 몸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 몸을 사용하고 잇는 것이 우리다. 우리 생각 또한 우리가 아니다. 우리 생각에 지침을 주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다. 우리는 가치있거나 또는 한탄할 만한 인격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망칠 수도 잇다.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도대체 이‘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우리는 과연 자기 중심 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게에서 어떻게 이 자기 중심주의를 뿌리뽑을 수 있을까?

삶은 모든 사람에게 운 좋게 거머쥐거나 잘못 빠지기 쉬운 기회와 함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능성의 그물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꾸려감으로써 그 표적을 남기는 것이다.

-스코트는 초기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제학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근대사회에 생겨난 부자와 가난한사람들 사이의 엄청난 불평등에 충격을 받았다.

부자는 부와 여가, 헤아릴수 없이 많은 기회를 누린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 과로, 지저분한 환경에 짓눌린다. 부자는 기회의 천국에서 살고 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의 지옥에 빠져 있으며, 부자의 천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지옥을 딛고 있다.‘

-스코트는 전쟁에 반대하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폭력과 무력 충돌이 생명과 사회의 부를 끔찍하게 손상시키며,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방안 가운데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전쟁이란 문명국가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르는 파괴와 대량학살이자,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벌이는 힘겨루기라고 보았다.

-사람은 대중의 생활습관, 도덕기준을 따라야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에 반대되는 사회에 대항하여 거슬러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저항의 길을 따를 것인가?

-이상적인 삶은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그 이상이 관례에서 멀어질수록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된다....당신의 이상이 정신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며, 정직하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면,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의식주마저 희생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창조와 개혁에 대하여 언제나 조슴스럽고 망설이며,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개혁자, 이미 알려진 길을 벗어나 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반대와 비난, 질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창조적 사고와행위에 따르는 희열에 대해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의 일부이다.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 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을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계급투쟁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만약 당신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하였을 것이다....그렇다 내가 성취해야 할 것이 바로 실패였다.

-군중보다 한발짝 앞으로 나가면 지도자가 된다. 두 발짝 앞서면 방해꾼이 된다. 세 발짝 앞서면 미친 사람으로 의심을 받는다.

자신의 가치기준을 세우고, 스스로 판단한 데 따른 결과를 참는 사람들은 그런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진다.

-첫사랑은 열정적이고, 억제할 수 없으며,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 사랑은 영원히 변치않겠다는 헌신의 언약들로 가득차 6년동안 이어지다가, 냉랭한 관계로 가라앉더니 마침내 무관심이 되었다. 비할 데 없이 훌륭하게 시작되 우리 관계는 지속될 때에는 사랑이 있었으나, 냉담함으로 끝났다./크리슈나무르티가 죽었으므로 그 스스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마당에.....

-삶은 흐르고 변화한다. 초기의 우정이나 사랑이 반드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가 언제나 꼭대기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가지들이 점점 더 높이 자란다. 전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꽃이 핀다.

-결혼하는 남녀는 서로 보완요소가 되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이는 논리적이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뇌의 왼쪽 부분이 우세했고,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실험을 즐기며 새로움을 좇는 오른쪽 뇌쪽이 우세했다.

-나는 구혼자들과 상류층 생활을 버렸다. 긴 머리를 자르고 좋은 옷과 보석, 값비싼 소지품들을 여자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떠날 준비를 했다.

부모님들은 유리한 조건의 결혼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므로, 내 결정에 불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다음 배 편에 몸을 실었다.

19세기의 미국 작가이자 편집자인 엘버트 허바드는 이렇게 썼다.

‘건강, 책, 일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 더해진다면 운명이 주는 모든 괴로운 고통과 아픔도 견딜만 해진다’

나는 스코트의 비서겸 조수가 되었고, 그 사람의 생활에 활력을 주면서 또한 거의 다루어보지못한 주제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성은 자연스러운 기능이고 온몸으로 표현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쪽 방향을 향하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데는 이차적인 것으로 보앗다. 우리가 얻은 것은 깊고 정서적인 우정과 사랑으로서, ‘함께 되기 위한 공간’에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맞추어 채워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뒤로 ‘내 남편’ 또는 ‘내 아내’라는 말이 지나친 구속과 소유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의 쓰지 않았다.

-‘당신의 수입 안에서 생활하라. 얻은 것보다 덜 쓰라. 쓴 만큼 지불하라’

-아테네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러 떼지어 다니는 시장을 둘어보던 소크라테스가 ‘저런, 없어도 살 수 있는 쓸데없는 물건이 저렇게 많다니’ 하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스코트는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스코트는 단정하게 옷을 입었으며, 언제나 신경을 써서 깔끔했지만, 모양을 내거나 유행따라 옷을 입지는 않았다.

그가 강연자인 줄 모르는 표 받는 이가 입장료를 내지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하자, 스코트는 그사람의 가슴을 밀어 주변의 시선을 끄는 것보다는 우리 두 사람 몫의 입장료를 내는 쪽을 택했다.

-스코트는 텔레비2죤을 문명이 만들어낸 공포스러운 물건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직접 하는 경험이다. 텔레비죤은 개인을 현실과 갈라서게 한다. 갈수록 더 수동적이 태도를 갖게 하고 무의식 속에 해로운 상을 불어넣으며, 의식을 둔하게 만들고 환각상태를 일으킨다. 텔레비죤은 전체로 보아 위험스럽고 바람직하지 못한 최면상태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스코트는 전화를 가리켜 ‘어느 때든 부르면 모습을 보여야 하는 하인처럼 사람을 불러내는 방해물이자 훼방꾼’이라고 불렀다. 헛간에 전화기를 두어서 필요한 때에만 가서 쓸 수 있도록 했다.

-일 주일에 하루, 보통 일요일에 우리는 소화기관을 쉬게 했는데, 가볍게 먹어온 아침식사와 점심을 생략하고 하루 종일 단식을 했다.

우리는 또 일종의 음식에 대한 방학기간으로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열흘 동안 단식을 했다. 우리는 그 기간에 물만 마시고 지냈으며 일도 줄였다. 우리는 금욕기간을 손꼽아 기다렸으며 그것이 육체와 정신에 이롭다고 믿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여분의 시간을 얻었다.

-모든 일의 해답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약간의 의문점을 품고 있는 것잉 더 낫다/제임스 터버.

부부로서 당신들의 공통관심사는 무엇입니까?...사회주의 조직, 여행..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문학..시 음악 그림..우주와 불가사의 문제..철학 삶과 죽음, 명상..채식주의, 가공하지않은 유기농산물...

-건강을 위한 우리의 간소한 식사법은...음식은 신선해야 하고, 유기농법으로 거둔 생산물로 가공되지않은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가공한 음식은 피한다. 당신의 식사법이 이런 방식에 가까울수록 소화기관과 건강에 좋다.

임어당으 ‘생활의 발견’에서 ‘행복은 대체로 장의 운동이 어떠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버트랜드 럿셀은 자서전에서 건강과 장수에 대해 말하면서 ‘하루에 두 번씩 빠짐없이 일정한 시간에 똥을 눈 것이 내 행복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엘버트 허바드;‘당신이 건강하다면 아마도 행복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 모두를 가지지 못했더라도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부를 가진 것이다’

우리가 건강과 장수를 위해 실천에 옮긴 몇몇 지침들;

적극성. 밝은 쪽으로 생각하기.깨끗한 양심.바깥일과 깊은 호흡. 금연.커피와 차를 포함해 술이나 마약을 멀리함.간소한 식사.채식주의.설탕과 소금을 멀리함. 저칼로리와 저지방. 되도록 가공하지않은 음식물. 이것들은 삶에 활력을 주고 수명을 연장시킬 것. 약 의사 병원을 멀리하십시오.

-신을 믿습니까?

‘우리 모두를 이어주는 에너지의 총화’...흔히 보는 것이 아닌 흥미로운 정의...‘우리’을 빼면 어떨까요? 인간만이 관련되는 것같아서 ‘우리’를 빼면...동물.꽃.바위.나무 그 밖에0 모든 것을 쉽게 넣을 수 있다.

그것을 신의 정의로 한다면...나는 있는 그대로의 우주, 모든 것이 그 나름으로 구현되어 있는 우주를 믿는다.

나는 또한 우주는 순간순간 조금씩 변화하고 있으며, 언제나 변화하는 전체로서 그것이 있음을 믿는다. 이것은 ‘신’이란 말을 보다 간결하게 ‘전체로서의 있는 그것’/All that is'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신God과 존재Being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내가 만일 의사처방대로 한다면, 내 삶의 남은 기간동안 의사의 감독아래 수명을 늘리려고 애쓰는 셈이 되는 것이다. 고맙지만 나느 그런 과정을 밟느니 차라리 일찍 죽는 편을 택하겠다. 내 방식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보통의 건강과 원기를 유지하면서 적절히 절제[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다. 내가 올바른 식사방식과 절제[된 생활로 잘 지낼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는 것이 나와 내가 속해있는 사회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왜 채식주의가 되었는지에 대한 답변;

/여러가지 까닭이 있지만,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윤리이다. 죠지버나드쇼는;‘당신은 동물시체를 먹어치우는 끔찍한 버릇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지요?’

/우리는 고기를 먹어야할 합당한 까닭을 찾지못했다. 썩어가는 시체는 병균과 독소로 가득차있지만..유기농법으로 기른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 곡식은 생명력있고 깨끗하다. 채식은 육식보다 훨씬 단순하고 돈이 덜 들며 또한 온건하다.

/인류는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 중에 하나일뿐이다. 이 땅에는 동물과 식물과 같은 다른 삶의 양식을 지닌 것도 많다. 모두들 이 땅에서 서로 기대면서 살아가는 생존방식을 취한다. 이런 존재양식은 저마다, 추측컨대 어떤 목적을 지닌 에너지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모든 것이 여기서 살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기여한다. 모두는 그 자신의 삶을 살면서, 또 많든 적든 다른 삶의 양식과 공존하고 있다. 인류는 이 생명체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고, 형제 같은 존재들을 도구로 만들며, 노예로 부리거나 사고 팔며, 죽이고 먹을 수도 있다. 인류는 또한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실험용으로 그 생명체를 이용한다.

/우리와 같은 생명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 권리가 있다. 우리는 그 생명체들을 괴롭히거나 해치지않고 그들이 살아가고 진화하도록 돕고 싶다.

/당신은 빈대. 흰개미. 파리. 모기.바퀴벌레 같은 해충들을 죽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않으면 그 해충들이 금세 지구를 뒤덮어 사람이 살 수 없게 될 거라고 두려워한다.

/동물들은 우리 형제들이다. 우리 곁에서 성장하는 지구상의 다른 종족이다. 동물들은 열등하지않으며, 형태가 다른 자아들이다. 동물들 중 어떤 것들은 지느러미가 있고 어떤 것들은 날개가 있고, 어떤 것들은 두 다리를..어떤 것들은 네 다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리가 두 개뿐이지요.

우리는이 창조물들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약탈하고 우리에 가둔다. 야생 그대로 지내야 하는데도 우리는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노예로 만들며 행동방식과 삶을 바꿔놓는다.

/스코트는 동물을 부리거나 애완용으로 삼는 데 반대했다. ‘동물들을 존중하라. 동물들이 자유롭게 달리도록 내버려두라’

-나는 손을 써서 의사소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편지를 손으로 쓰고있다. 나는 구술녹음기는 말할 것도 없고 타자기조차 거의 쓰지 않는다. 나와 내가 종이 위에 쓰려고 하는 것 사이에 기계가 끼여드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돌아다닐 일이 있으면 되도록 늘 걸어다닌다. 어쩔 수 없을 때만 기계 교통 수단을 이용한다. 나는 내 발을 땅에 딛고 주변을 관찰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내 목적과 계획, 행위 사이에 바깥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것이 내 방식이다. 인생은 단추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고 건설하며, 일정한 형태로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의미가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진지하고, 지나치게 ‘고지식하다’는 지적들이 많았다. 스코트는 그냥 마시고 떠들 뿐인 ‘파티’에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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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과 저녁별;

‘이제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단단한 요새 같은 집의 벽과

꽉 물린 자물쇠와 걸쇠,

굳게 닫힌 문의 보호에서

나을 놓여나게 해주십시오.

소리없이 미끄러져 나가게 해주십시오.

부드러움의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속삭임으로 영혼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상냥하게 초조해하지않고

(당신의 힘으로 죽음을 거두시고,

사랑을 지키십니다.)/월트 휘트먼, ‘마지막 기도’

오랫동안 스코트와 나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고 죽음이 어떤 것일지 큰 기대를 가져왓는데, 이제 스코트가 삶의 마지막에 점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이야기하고 책을 읽었다.

우리집 서재에는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관한 책이 수십권 있는데 그 가운데 희귀본으로 유명한 프랑스 천문학자 카미유 클라마리응이 쓴 세 권짜리 책, ‘죽기 전’‘죽음’‘죽은 뒤’가 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연속성과 의식이 이어짐을 믿었다.

우리앞에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는 더 많은 만남과 더 많은 기회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아니라 옮겨감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삶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출입구였다.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불가지론자 로저 볼드윈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코트는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지지. 두 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

스코트는 오랫동안 스스로 의도하고 목적이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해왔다. 그이는 자신이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앗다.

‘왜 우리의 마지막 날과 죽음을 그렇게 소란스럽게 만들어야 할까?’하는 의문을 가졌다.

쾌적하고 낯익은 환경속에서 조용하고 조화롭게 사라지는 대신에, 우리는 비싼 돈을 들여 우리가 사랑해온 이들을 병원이나 요양소로 보내어, 그 과정을 편안하게 돕기 보다는 자연스럽지못한 수단으로 막으려는 낯선 사람들에게[ 맡긴다.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떠날 때는 적어도 어느 만큼 우리의 목표를 이룬 가운데 위엄과 완전함을 지닌 채 갈 수 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가 지향해서 일해온 우리 삶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스코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간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넒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스코트는 자기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했다. 그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고, 의식을 갖고 또 의도한 대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이는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죽음으로서 그 자신을 완성할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배워왓는데 이제 어떻게 죽는지 배우고자 했다. 노자는 ‘생명이 열매를 맺고, 떨어지게 하라’고 말했다. 스코트의 삶은 완전한 열매을 맺게 되었으니, 이제 가도록 놓아둘 준비가 되었다.

다일런 토마스는 ‘이렇게 좋은 밤에 점잔을 떨수는 없잖은가’하고 노래했지만, 스코트는 자신의 죽음이 점잖고 목적이 있으며 아울러 평온하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이는 궁극적인 경험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몽롱하거나 의식이 없는 채로 가는 대신 죽음을 음미하고 심지어 즐기고자 하였다. 그이는 특히 소로와 웰즈 경우와 같은 평온한 최후를 좋아했다.

/1862년 소로의 누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오빠가 오랫동안 앓고 있을 때도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평이나 우리와 같이 남아 있으려고 하는 소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오빠의 완벽한 만족감은 참으로 훌륭했으며, 생기와 기쁨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이윽고 숨이 점점 약해졌고, 아무런 저항없이 오빠는 우리를 떠나갔다.’

/기자가 웰즈와 마지막 날 즈음에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그는 지나치리만큼 기자를 소홀히 대접했다.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죽느라고 바쁜 걸 보지 못하시오?’하는 말이 기자가 들은 말 전부였다.

이 두 이야기는 스코트를 즐겁게 했으며,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이 떠나는데 좋은 모범이 되었다.

죽음에 맞닥뜨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방법들이 있는가? 죽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다. 죽음이 실제로 어떨지는 우리 자신이 갈 때까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뒤틀린 떠남 또는 꽝 닫힌 문처럼 만들 수도 있고 또는 조화로운 정점, 절정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행동으로 죽음을 맞는가 하는 열쇠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바람직하기로는 열린 눈과 감각을 가지고 떠나며, 옮겨감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준비하면 우리는 분별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뜰을 걸어내려가, 문을 열고 그 길의 모든 과정을 눈여겨 보면서 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훨씬 더 위험하고 혼돈스러운 과정인 탄생의 과정을 겪었으며 그것을 넘어 살아왔다. 이제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보아야 할 때다.

스코트가 아흔여섯이 되자, 나는 그이의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이의 건장한 체격은 마침내 쇠약해지고 육체는 다해가고 있었다. 그 몸은 다 닳은 연장이었고, 그이는 물러서서 자기가 바라는 새롭고 더 생산적이기조차 한 경험의 세계로 갈 준비가 되었다. 프로이드는 죽기 전에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온 뒤의 당연한 결과로서 나는 지쳐 있다네. 나는 이제 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연결되어 있던 유기적 요소들이 이제 서로 떨어지려 하고 있네. 대체 누가 그 요소들을 강제로 계속 붙어 있게 하고 싶어하겠나?’

스코트는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평생에 한 순간도 따분해하거나 흥미로운 주제을 잃어버린 일이 없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나이먹음 The coming of Age'에서 ’노인에게 건강보다 더 큰 행운은 계획을 세워 바쁘고 유용하게 살면서 권태와 쇠퇴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메인으로 이사온 1,2년 뒤부터 우리는 장의사에 돈을 주고서 미리 우리 자신의 화장에 대비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스코트가 ‘주위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내게 남긴 지침을 따르는 것인데, 이 지침은 1963년에 처음 쓰고 1968년에 그이의 이름 머리글자를 써 넣었으며 1982년에 다시 그렇게 했다.

1.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단식을 하고 죽고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다.

3.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주사, 심장충격, 강제급식, 산소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영역의 경험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4.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스프루스 나무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5.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에 관해 말한 30가지쯤 되는 인용구를 담은 쪽지를 만들어, 그이가 죽는 마지막날의 부고용으로 친구들에게 보낼 준비를 했다. 그 쪽지는 그이가 가기 전 해에 보여주고 허락을 받았다. 여기 그 몇 편을 옮긴다.

-당신은 배에 탔습니다.

당신은 항해를 했습니다.

당신은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리십시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60

-씨앗이 터질 때가 되면, 식물은 갑자기 낱낱으로 흩어진다.

그 순간 씨앗은 껍질 속에 갇혀 그렇게 오랫동안 좁게 누워 있던 상태가 파괴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새 세상을 얻는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와 탄생의 관계는, 우리와 죽음의 관계와 같은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지금까지 삶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조건들이 사라짐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감이었던 것이다./구스타브 페이너, 죽은 뒤의 삶. 1836

-죽음이 개인의 발전을 지속시킨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자리에 없을 때나, 잠잘 때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우리의 지각을 보존한다.

탄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죽음은 감각을 더 예민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없는 색깔을 보게 하고, 지금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하며, 우리 눈 앞에 있어도 만져볼 수 없는 신체와 대상물들을 알 수 있게 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에드윈 아놀드 경, 죽음과 그 너머.1901.

-죽음을 슬퍼하고 그럴 듯한 위로의 말을 던지는 사람이 불멸이라는 생생한 사실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육체가 영혼을 가졌는가? 아니다. 영혼이 육체를 가진 것이다. 영혼은 육체가 제 할 일을 다 했음을 알고, 아주 엄격하게 그것을 한쪽으로 비껴놓은 뒤 얼룩이 묻은 옷처럼 벗어버린다./루시엔 프라이스, 영혼의 기도.1924

-우리는 죽음이 육체의 끝이라는 것 말고 모든 모험의 종말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아직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너무나 익숙하고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흥분을 가져다주는 우리 자신들이 바로 우리가 일하는 일감이다./메어리 오스틴, 죽음의 체험.1931

(여기서 잠시 3인칭으로 말하겠다.)

스코트는 훌륭한 일생을 살았으며 훌륭한 죽음을 맞았다.

그이는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평온하게 죽었다.

그이는 바라던 대로 집에서, 약물이나 의사 없이, 병원에서처럼 제한을 받지 않고 헬렌이 함께한 가운데 갔다. 헬렌은 그이가 잘 해온 것에 기쁜 느낌을 가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에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어떠한 장애도 없었다. 그이는 헐떡이지 않앗고, 경련을 일으키거나 떨지도 않았다. 더 이상 숨이 남아있지 않고 더 이상 육체에 매여 있지 않을 때까지 단지 부드럽게 숨을 쉬었다. 그럴 수 없을 만치 순조로웠다. 아름답고 편안한 임종이었으며, 다만 생명의 숨을 멀리 보냇을 뿐이었다.

계획했던 떠남을 곁에서 도우면서, 헬렌은 슬픔없이 그이의 마지막을 지켜 보았다. 헬렌은 손실이 아니라 그이가 해방됨을 느꼈다. 헬렌은 그이가 그렇게 가서 행복하게 느꼈으며, 자기 차례가 되면 자기 또한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다.

헬렌은 삶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출발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가 기여할 수 있는 시간이 몇 해 더 남아 있었다.

스코트의 죽음은 자신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를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사라지는 인격체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느꼈다. 그이라는 존재의 정수, 실재는 죽지 않고 남아 있다. 덮개와 껍질은 어쩔 수 없이 단명할 수밖에 없다.

(스코트의 100세 생일인 8월 6일과 그이가 죽은 8월24일은 간격이 24일이 채 안되었다.)

(다시 1인칭으로 바꿔 말한다.)

스코트가 죽은지 6년이 지나 내가 여든다섯이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내가 나이먹었음을 알았다.(헬렌은 스코트보다 스물한살이 어렸다....53년동안 함께 살았다.)

나는 오랫동안 빠르게 페달을 밟아왔다. 나는 이제 분명히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으며, 더 이상 예전에 쉽게 그랬듯이 힘있게 오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가야 할 때, 천천히 내릴 때가 왔음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나는 걱정없는 행복한 여행객이었으며, 이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모퉁이를 돌면 끝이다.

죽음 없는 삶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육체적 삶? 죽음과 소멸은 모두 하나로 만든다. 관계들은 뒤얽힌다. 저마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영속하는 것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섞이는 것이다.

죽음은 몇십년의 적당한 간격을 두고 우리를 느슨하게 한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다. 삶이라는 학교를 떠나 이제 그만 일하라는 통지를 건네주며 쉬라고 말한다. 이제 그만 끝이다.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

하루 일이 끝나면 밤이 잠의 축복을 가져다 주듯이, 죽음은 더 큰 날의 시작일 수 있다.

아직 앞에 남아있는 가능성있는 날들을 내다보면서 일정표를 만드는 것이 내게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나는 마침내 노년을 경험하고 있으며 보상이 없지 않음을 발견하고 있다. 사람이 실제로 나이를 먹으면 더 깊이 보고 들을 수 있다. 당신이 저녁노을, 나무, 눈 또는 겨울을 아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일지 모른다.

바다, 호수, 모든 것이 어린 시절처럼 마법이 되고 놀라움이 된다.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본다. 더 깊은 열락과 이해을 가지고 음악, 새의 노래, 바람과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익스피어의 73번 소네트 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머지않아 떠날 것을 더할 나위없이 사랑하게’된다.

모든 것은 덧 없으며, 사라진다. 내일도 그 자리에서 언덕 뒤로 지는 해를 보고, 이른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며, 깊은 밤 하늘의 깊은 침묵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면, 지금 그것을 깊이 맛보도록 하자.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끌어들여 잘 맛보고 소화하도록 하자.

스코트는 이상주의자였으나, 강인하고 실천하는 일꾼, 곧 실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또 타고난 종교인이었으나, 어떤 교회의 구성원도 아니었고 어떤 종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학식있는 사람이었으나 땅벌레같은 농사꾼이었고, 공적인 인물이었으나 운둔자로서 행복했고, 명망있고 우렁찬 웅변가였으나 보통 대화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학문적인 주제에 관해 간결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글을 썼으나, 일상 생활에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없이 변화하지만, 어떤 것도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인과율의 흔들리지 않는 법칙속에서 다른 모든 것과 이어진다.

나는 삶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일단 한 번 생겨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낀다.

내가 스코트에게 주고, 또 그이에게 받은 사랑, 그리고 내가 아는 수많은 여성, 남성들과 주고 받은 사랑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진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사랑한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은 하늘의 영광을 더하는 것이다. 모든 나이, 장소, 시간에서 느껴온 사랑이 빛나고 있지 않은가! 영원히 진행되고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원천이자 목표이고, 완성의 도구이다.

사랑의 그물이 지구를 가로지른다. 미묘하게 빛나는 선들이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는 망을 만든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랑의 끈들이 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진행되고 있다. 사랑에 참여하고 사랑을 주는 것은 인생의 가장 위대한 보답이다. 사랑에는 끝이 없으며 영원히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과 떠남은 삶의 일부이다.끝.2011.11.15.화.읽음(2012.3.13화 다시 훑어봄/독서노트2012.3.15.목)

*헬렌 니어링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나서 1995년 죽었다.(스코트 니어링은 1883년 태어나...1983년 세상을 떠났다...21살 차이...53년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