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보인다 보여'----후지산에서
2004.9.26,일.
3 合目, 해발 1786m 지점,
관광버스가 올라가는 5 합목 해발 2305m 까지는 3-40분 더 올라가야 한다.
후지산의 높이는 해발 3886m,
정상을 보여주는 것이 고작 1년에 30여회, 물론 변화무쌍한 기상변화 때문인데도 일본사람들에게는 이것 또한 신비한 무엇으로 만들어 ‘호들갑’ 떤다.
그들은 7월과 8월만 후지산 등정을 용인하면서 그 신성을 그 자연을 보호하고 있다.
사전승인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용한다는데 5 합목에서 정상까지는 6시간 정도.
옛날 후지산을 호롱불을 들고 올랐다는데, 한 호롱불의 기름이 끝나는 시간의 길이를 1 합목, 정상까지는 10합목의 시간이 걸렸다 한다.
비가 오다가 그치고 그치다가 또 온다.
비가 그치는 사이 햇볕이 났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안개가 흘러가고, 단풍도 가끔씩 보이고, 구름이 떠돌면서 왔다갔다 한다.
다시 밝아진다. 그러나 하늘은 잔뜩 흐리고 구름만 가득하다.
발 아래를 보니 구름, 안개 그리고 푸른 숲,
바다인가 하늘인가 알 수가 없다.
갑작스레, 순식간에, 뭉뚝한 것이 나타난다.
후지산의 정상은 아니고 9 합목쯤,
구름인가 안개인가 그 사이로 뭉툭하면서 펑퍼짐한 적갈색의 토기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 나타난다.
구름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가니 상처의 딱지 같은 것이 덕지덕지 군데군데 붙어있다.
하늘에 접근하여 착근하려는 뭉툭한 뿌리인가, 묵직하면서 근엄해 보인다.
더 이상은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 치마끈을 풀어내야 하는 것인데 감칠맛만 풍기고 입을 딱 씻어버리는 것.
가끔 정신이 살짝 나가면, 뭔가에 홀리면,
치마를 홀라당 벗어내어 하얀 정상까지 내보여준다는데 여간해서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
1년에 잘해야 30여 회.
후지산은 여자여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구경을 와서 시샘을 하여 그렇다는 둥,
반할만한 남자가 오지 않으면 아무에게나 속옷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둥,
인간들 편하게 이런저런 말들이 있어 한바탕 웃음거리가 된다.
후지산을 보러 오는 남자는 모두가 못생겼으며, 여자는 아름답다는 것이니
바야흐로 후지산도 여성이 점령해버린 것이 아닐까.
간단한 점심.
나베우동, 샤브샤브식, 밥,국물,
무료선물 아기종의 상술.
돈 따라 인심 따라 오는가, 상인들의 한국말이 유창하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안개가 더 자욱하다.
5 합목, 2305m.
안개가 가늘가늘 실방울이 되어 온몸을 휘감아 돈다.
싸늘한 기운까지 함께 어우러지면서 야릇한 분위기가 나오려 한다.
저 안개에, 구름에 둘러싸인 후지산은 무엇인가.
정말 부끄러운 것인가,
정말 질투하는 것인가,
아니면 더 올라오지 말라는 경고인가,
무엇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보내고 있는데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어내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신은 그냥 신의 몫을 하고 있을 뿐,
자연은 다만 자연스럽게 자연을 보여주고 있을 뿐,
그것을 받아들이고 풀어내는 것은 우리들 인간의 몫이라는 것일 게다.
후지산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
이제는 남자가 되어 아름다운 여인이 보이니 남자의 시커먼 숨은 뜻을 살짝 보여주는 것인가.
펑퍼짐한, 넉넉하게 붉은 얼굴, 산사나이의 못생긴 얼굴이 또 금방 사라져버린다.
안개가 얼굴가리개가 되어 산을 찾은 사람들을 감질나게 한다.
잠깐사이, 난리가 난다.
차 속의 사람들이 차를 빨리 세우라고 아우성이다.
어느 사이에 햇살이 구름속에서 나오고 예의 그 붉으스름한 뭉퉁한 토기모양이 눈에 들어온 것.
후다닥 차에서들 내리고, 웅성거리고, 샷타를 눌러대고, 야단법석이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후지산이 무엇인지,
후지산이 보이면 어떻고 안보이면 어떤지,
이것이 사는 것인지.
후지산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후지산은 필경 이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어느 사이 후지산이 구름치마를 불렀는지, 안개치마를 둘렀는지,
소란 피우는 사람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안개를 불러들여 구름장막을 치고 그의 아름다움을 숨기고 그의 신비함을 더 올리는 것인가.
나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 혼자 바삐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즐기고 있었다.
후지산이면 후지산이었지, 무에 대단한 것인가.
후지산 정상을 보면 어떻고 못 보면 어떨 것인가,
내가 가족과 함께 왔느냐 홀로 왔느냐가 더 중요하고 다를 것이었다.
그러나 호들갑떨어대는 사람들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 한켠 깊숙이 예의 나의 ‘국수주의적’ 옹졸함과 편협함이 도사리고 나왔다.
백두산을 먼저 봤어야 하는데,
백두산을 먼저 보고 난 느낌을 메모했으면 더 좋았을 터인데 그것이 좀 아쉬웠다.
언제나 백두산을 올라가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