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여행기

성인봉 가는 길2---'나무 사다리가 있는 꿈길'(10)

햄릿.데미안.조르바 2004. 7. 27. 01:51

산행을 시작한지 1 시간 여,
가파르고 힘든 아스팔트 고갯길이 끝나고 이제야 비로소 흙의 산길이 나타났다.
거기에 외딴집 하나, 마루 위에 빛 바랜 액자가 ‘어울리지 않게’ 한마디하고 있었다.
‘굽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곧게 할 수 없다’
강원도 비탈이 울릉도에 놀러 왔다가 울릉도 비탈을 보고서는 그냥 울고 갔다는데,
울릉도의 비탈길을 오르는 산행객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려고 하는 것일까?
성인봉 가는 길이 크게 굽어지고 또 많이 가파르니 쉽게 가려하지 말고,
그저 우직하게 꼿꼿이 끝까지 오르라는 것일까?
나도 ‘어울리지 않게’ 되는 대로 꼬아서 풀이해버렸다.

아침 8시,
安平田,
안녕하고도 평화로운 밭, 이름 한번 좋다.
성인봉까지 3.2 Km.

성인봉을 오르는 길이 크게 셋이 있었다.
도동항 가까운 대원사에서 바로 오르거나,
나리분지에서 트래킹 코스를 밟거나,
전세택시로 이곳 안평전까지 와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아스팔트길을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는,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정표를 막 지나니 산비탈 텃밭 속에서 장끼와 까투리가 후드득 날아갔다.
그들의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았나 미안하면서도 모처럼 꿩들을 보니 내 몸 속에 있던 욕심덩어리들이 함께 날아갔으면 싶었다.

우와, 캡이야 캡! 짱!
어떤 인물에 대한 극존칭 또는 어떤 사물의 최대값을 표현한다는,
저절로 요즘 아이들 표현이 터져 나왔다.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펼쳐졌던 ‘숲 속의 교향악단’의 자리하곤 또 달랐다.
또 다른 신천지.

산길,
그것은 오솔길이었다.
자욱한 안개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성인봉 가는 산 전체를 홀로 차지한 것이었다. 전산 전세.
일요일의 북한산이나 청계산, 관악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그런데 오르는 길이 '지그재그'로 나있었다.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지혜롭고 현명한 최선의 선택 아닌가.

산으로 들어온 지 벌써 90여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나무와 나무 숲 사이로 언뜻언뜻 바다가 보이고,
귀를 열어 기울이면 파도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산비탈의 기울기가 그만큼 가파르다는 것이고,
지그재그로 올라오는 것이니 바다와는 직선거리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이리라.
늘씬하게 쭉쭉 뻗어있는 나무들 속에서,
우린 하나의 키 작은 나무가 되어 자연스럽게 숲 속의 일원이 되어 버렸다.
해는 보이지 않고 연기 같은 옅은 안개만 자욱할 뿐,
숲 속은 우릴 이미 속세의 인간으로 여기지 않으려 하였다.

이 깊은 산 속에 웬 나무 사다리가 있단 말인가?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길마다 나무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거무튀튀한 돌들 위를 올라가기 덜 부담스럽게 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자연의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자연을 위한, 인간적인 너무나 자연적인 나무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서울 근교의 아스팔트길이나 인조목 계단을 생각하면,
이런 자연스러움과 이런 호사스러움이 따로 없었다.
빽빽한 나무들이 조명하는 자연스러운 어두움과 밝음,
낮게 깔리며 우리들 발 밑에서부터 우리들 키를 넘나드는 자욱한 안개,
그리고 엉성하면서 호사스러운 나무 사다리,
우리들은 나무 사다리를 타고 넘으면서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숲 속은 꿈속이 되었으며,
우리가 걷고 있는 숲길은 어느새 꿈길처럼 변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움을 어찌하면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을까.
이 황홀함을 우리만 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이냐, 혹 죄가 되지는 않을까, 어찌하면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미안함도 죄스러움도 털어 버릴, 어찌할 방법이 없을까.
부지런히 디카의 샤터를 눌러보지만,
잡히는 것은 자욱한 안개와 하늘 따라 올라가는 쭉쭉 뻗어있는 나무들 뿐,
내밀한 저 아름다움과 내 마음의 황홀함은 도저히 담아낼 수가 없었다.

오전 9시경.
지그재그 하기를 수십 번,
어느 정도 산비탈이 일단락 되었는지, 어느 중간 봉우리에 닿았다.
드디어 해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동안 해는 하늘에 있었지만,
우리가 숲 속 깊이 나무들 속에 있었으므로 안개만 만났을 뿐이었다는 것.

반대편으로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저기 보이는 것이 바다인가, 하늘인가.
안개인지 구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바다일지 하늘일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입구에서 펼쳐진 그림이 이제는 더 엷어진 색깔로 채색되어 눈으로 들어왔다.

해가 떠있던 봉우리를 지나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니, 이런 일이라니!
우리가 지금 바다 속에 있는지, 숲 속에 있는지 잠시 헷갈리고 말았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모두가 푸르고 푸른 숲뿐이고,
쭉쭉 하늘로 뻗어있는 나무들을 따라 얼핏 하늘을 보면,
해는 보이지 않고 저 파랗다가 하얗기도 한 것이 하늘인지 바다의 수면 위인지,
정말 혼동하고 착각되고도 남았다.